좋은 시

제3회 김종삼시문학상 / 길상호 시인

네잎 2020. 4. 8. 21:23

제3회 김종삼시문학상 / 길상호 시인       

저물녘 4편  

 

 

 

 

노을 사이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역

 

누군가는 떠나고

또 누군가는 남아 견뎌야 하는 시간

 

우리 앞엔 아주 짧은 햇빛이 놓여 있었네

 

바닥에 흩어진 빛들을 긁어모아

당신의 빈 주머니에 넣어주면서

 

어둠이 스며든 말은 부러 꺼내지 않았네

 

그저 날개를 쉬러 돌아가는 새들을 따라

먼 곳에 시선이 가닿았을 때

 

어디선가 바람이 한 줄 역 안으로 도착했네

 

당신은 서둘러 올라타느라

아프게 쓰던 이름을 떨어뜨리고

 

주워 전해줄 틈도 없이 역은 지워졌다네

 

이름에 묻은 흙을 털어내면서

돌아서야 했던 역, 당신의 저물녘



장조림     

 

 

오늘의 이야기는 끝이 났어요

내일의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해요

 

스위치를 끄면 어둠이 고여 드는 방,

밤은 적당히 짜고 달고 매콤하고

 

얽힌 손길에 더는 곰팡이가 피지 않도록

지금은 저 방에 나란히 갇혀야 해요

 

배꼽 속 지루한 인연이 모두 우러나오고

눈에 담긴 통증도 흐물흐물 풀리면

 

액자 속 다정했던 시절로 우리

찰칵 찰칵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몰라요

 

방 안 가득했던 어둠이 졸아들면

정수리에 모여든 쓸쓸한 거품을 걷어주면서

 

이제 어떤 말에도 쉽게 상처 받지 않는

짭조름한 심장을 갖고 살기로 해요

 

한없이 뒤척이게 되더라도 그건

서로가 서로에게 배어들기 위한 일,

 

검은 밤이 너무 일찍 끝나버리면 안 되니까

심장의 불꽃을 중불로 내려주세요




꽃 이름을 물었네  

 

 

 

 

이건 무슨 꽃이야?

 

꽃 이름을 물으면

엄마는 내 손바닥에 구멍을 파고

꽃씨를 하나씩 묻어 주었네

 

봄맞이꽃, 달개비, 고마리, 각시붓꽃, 쑥부쟁이

 

그러나 계절이 몇 번씩 지나고 나도

손에선 꽃 한 송이 피지 않았네

 

지문을 다 갈아엎고 싶던 어느 날

누군가 내게 다시 꽃 이름을 물어오네

 

그제야 다 시든 꽃

한 번도 묻지 않았던 그 이름이 궁금했네

 

엄마는 무슨 꽃이야?

 

그녀는 젖은 눈동자 하나를 또

나의 손에 꼭 쥐어주었네




서로의 엄마     

 

 

 

눈바람의 난동이 잠잠해지고 나서야

방목지엔 아침이 찾아왔다네

 

창파족 늙은 아낙은 레보 천막을 걷고 나와

새끼 염소들을 햇볕 위에 내려놓는다네

 

고원의 한기를 견디기엔 아직 어린 심장

그녀는 밤새 그것들의 엄마가 되어 주었다네

 

마니차**를 돌릴 때마다 준다던 업보는

절룩절룩 무릎뼈만큼 닳았을까

 

돌담 우리 안에 웅크려 있던 어미 염소들도

그녀의 헛기침에 하나둘 깨어나고

 

이제는 엄마를 바꾸어야 할 시간,

유목의 가족들을 위해 준비한 따뜻한 젖

 

양동이가 출렁거리며 채워지는 동안

그녀와 염소는 몇 번이고 흐린 눈을 맞춘다네  

 

 

 

창파족: 유목민의 이동식 전통 가옥.

**마니차: 티베트 불교의 경전을 새겨 넣은 원통형 도구.



혀로 염하다    


 

 

 

트럭에 치인 새끼 목덜미를 물고 와

모래 구덩이에 눕혀놓고서

 

어미 고양이가 할 수 있는 건 오래 핥아대는 일

 

빛바랜 혀를 꺼내서

털에 배어든 핏물을 닦아댈 때

 

노을은 죽은피처럼 굳어가고 있었네

 

핥으면서 꺼진 숨을 맛보았을 혀,

닦으면서 붉은 눈물을 삼켰을 혀,

 

어미는 새끼를 묻어놓고 어디에다 또

야옹, 옹관묘 같은 울음을 내려놓을까

 

은행나무가 수의로 바닥을 곱게 덮어놓았네     

 

 

▶수상 시집 오늘의 이야기는 끝이 났어요 내일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해요(걷는사람,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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