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자라는 집"
................................- 최하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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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자라는 집에서는 작고 애매한 파동이 아침 내내 일어 새들이 무리로 물어내어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집 안은
잡목숲을 따라오는 파동 때문에 금세라도 지붕이 무너져내릴 듯했습니다 그 집의 역사가 유지되는 것은 순전히 숭숭 구멍을 뚫어대는 동박새라든가
딱따구리 새앙쥐의 역할인 듯했습니다 한낮이 되어 늙수그레한 남자가 나타나 비음이 심한 목소리로 무어라곤지 중얼거렸지만 파동은 조금치도 변동이
없었습니다 나무가 자라는 집을 구성하고 있는 지붕과 유리창 마루 거실들은 파동에 떨고 반향하며 근원 같은 곳으로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오후가 되자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한동안 울렸건만 아무도 뒤란을 돌아 문을 따주러 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나무가 자라는 집은 더욱 깊은 파동 속으로 들어가
움쭉도 않았습니다 해질 무렵 예의 남자가 잠시 나타나 뒷걸음치듯 주춤거렸지만 그것도 잠시, 남자는 잡목숲으로 사라지고, 시간이 열렸다가 닫히고
나무가 자라는 집은 깊은 적막에 빠져들어갔습니다
.# ...최하림 詩集(문학과지성
시인선ㆍ218) ..『굴참나무 숲에서 .........아이들이
온다』중에서_
■ epi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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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산들이 앞서거니뒤서거니 하며 어둠 속으로 잠겨가듯 내 시의
모습들도 하나둘 시간의 장막 속으로 사라져간다. 한 세기가 가고 또 다른 세기가 오듯 상형 문자들이 빛을 잃고 시들어가듯, 나는 사라지는 내
시의 그림자들을 꿈결이듯 물끄러미 보고 있다.
이만쯤에서 나는 내 시의 로프줄을 끊어버리고 싶다. 창조적 정신을 잃고 관성에
의지하는 시라면 없는 이만 못하다. 그런 시들이 지상의 평화를 해친다.
."집으로 가는 길"
......................- 최하림 시인 -
나 물 속처럼 깊이 흘러 어두운 산 밑에 이르면 마을의 밤들 어느새 다가와 등불을 켠다 그러면 나 옛날의
집으로 가 잡초를 뽑고 마당을 손질하고 어지러이 널린 농구들을 정리한 다음 등피를 닦아 마루에 건다 날파리들이 날아들고 먼
나무들이 서성거리고 기억의 풍경이 딱따구리처럼 소리를 내며 달려든다 나는 공포에 떨면서 밤을 맞는다 밤이 과거와 현재로
부유스럽게 흘러간다 뒤꼍의 우물도 물이 차오르는 소리 밤내 들린다 나는 눈 꼭 감고 다음날 걸어갈 길들을
생각한다
..- 同詩集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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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의 아침"
.................- 최하림 지음 -
안개
속으로 부드러운 가지를 드러내는 버드나무들이 바람의 방향 따라 흔들리는 걸 보며 나는 옥수수빵으로 아침을 때우고 마루를
닦기 시작한다 책들을 치우고 의자를 옮기고 쓰레기통을 비운 뒤 구석구석 물걸레질하다 보면 현관으로는 햇빛이 들어와 물살처럼
고이고 바람이 산 밑으로 쓸리면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소리로 철새들이 말하며 가는 것을 본다 순간 나는 몸이 달아오르는
걸 느낀다 오늘 같은 날은, 나를 상자 속에 가두어 두고 그리운 것들이 모두 집 밖에 있다
..- 同詩集에서 -
..."나는 너무 멀리 있다"
..........................- 최하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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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흐리고 가랑비 내리자 북쪽으로 가려던 새들이 날기를 멈추고 서 있다 오리나무숲 새로 저녁은 죽음보다 조금
길게 내리고 산 밑으로는 사람들이 두엇 두런두런 얘기하며 가고 있다 어떤 충격이 없이도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다 바람도 그들의 머리칼을 날리며
그들식으로 말을 건넨다 바람의 친화력은 놀랍다 나는 바람의 말을 들으려고 귀를 모으지만 소리들은 예까지 오지 않고 중도에서 사라져버린다 나는
그것으로 됐다 나는 너무 멀리 있다 나는 유리창 너머로 마른 나무들이 일어서고 반향하며 골짜기를 이루어 흘러가는 것을 보고 있다 나는 모두를 알
수 없다 나는 너무 멀리 있다 새들이 다시 날기를 멈추고 시간들이 어디로인지 달려가고 그림자들이 길 위에서 사라지는 것을 나는 보고 있다 이제
유리창 밖에는 새도 나무도 보이지 않는다 유리창 밖에는 유령처럼 내가 떠오르고 있다
...- 同詩集에서 -
."詩를 태우며"
................- 최하림 지음 -
밀면 돌멩이 되어 가는 불빛에도 흔들릴 石佛로나 돌아가
웃을까 동서로 떠돌며 노래부를까
나는 詩 써서 시인이고 싶었건만 오늘은 느티나무 아래 시들을 모아 불태우네 점점이
날아가는 새들과 아직은 체온이 남은 기억들 그리고 지평선에 떠도는 그림자들
나는 詩 써서 시인이고
싶었건만……
..- 同詩集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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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
..................- 최하림 지음 -
바람이
상처를 쓰다듬고 가는 비탈마다 새들은 날아오르며 완만하게 계곡을 빠져나간다 저녁은 예나 없이 부유스름하다 여인들은 바구니를
들고 시간이 얼비치는 극락강 길을 돌아간다
여인들은 상수리숲으로 들어갔다가 나오고 옥수수밭으로 들어갔다가 나오고
때로는 볼이 붉은 놀 속으로 들어갔다가 한동안 머물러 있기도 한다 그런 때 여인의 허벅지는 창대처럼
뻣뻣하다
감각만으로 사물을 본다는 건 위험한 일이다 감각은 거죽에 불과하다 세계는 훨씬 더 복잡하고 혼란스럽다
외딴집에서는 쿨룩거리는 노인의 천식성 기침 소리 들리고 어둠이 켜켜이 내려와 유령처럼 변한다
나는 고요의 세계를 보고
있다 세계가 숨쉬는 소리 들린다 별들은 아직 뜨지 않았고 극락강 물은 캄캄하고 우리들의 눈이 닿는 곳에서는 고요가
일어선다 보이지 않게 여인들이 손잡고 일어선다
..- 同詩集에서 -
."집으로 가는 길"
...................- 최하림 지음 -
많은
길을 걸어 고향집 마루에 오른다 귀에 익은 어머님 말씀은 들리지 않고 공기는 썰렁하고 뒤꼍에서는 치운 바람이 돈다 나는 마루에
벌렁 드러눕는다 이내 그런 내가 눈물겨워진다 종내는 이렇게 홀로 누울 수밖에 없다는 말 때문이 아니라 마룻바닥에 감도는 처연한
고요 때문이다 마침내 나는 고요에 이르렀구나 한 달도 나무들도 오늘 내 고요를 결코 풀어주지는
못하리라
..- 同詩集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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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는 고요히 어둠을 본다"
..........................- 최하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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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도 버드나무가 몸 비비는 소리 들으며 눈을 뜨고 일어나려니 저 멀리 立巖山 쪽으로 새들이
골짝을 만들며 내리는 것이 보인다
강가에서 다 자란 풀들이 시끄럽게 이파리를 날리며 동쪽으로도 서쪽으로도
쏠린다
오후엔 굵은 비가 들녘을 때렸다 순간 자연의 평화가 깨어지면서 넘실거렸다
나는 버드나무 아래로 송사리
피라미 물방개 같은 것들이 굽이치는 물 속으로, 거칠고 맵시 있게 노닐면서 사라지는 것을 본다
밤에는 고요히 어둠이
온다 나는 더듬거리며 '어둠이여'라고 부른다 어둠이 이불처럼 감싸고 잠들 준비를 하게 한다
..- 同詩集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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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解說 - - 가장 파동이 작은 노래
.............................................- 황현산(문학평론가) -
최하림은 『산문 시대』의 동인으로 활약하던 60년대초부터 지금까지 문학의
현장과 역사가 가볍게 여길 수 없는 詩들을 써오면서도, 그 성과에 미치지 못하는 주목만을 받아왔던 이유에 관해서는 이미 한 비평가의 좋은 설명이
있었다. 그의 두번째 시집 『작은 마을에서』의 해설에서 김치수는 이 시인이 우리의 시단을 주도해왔던 두 경향의 어느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순수와 참여의 분리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시의 완성'이라는 목표에 연결시키려 했던 데에 그 원인이 있다고 말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최하림은
우리 시대의 다난한 역사의 현장을 크게 벗어난 적이 없지만, 논의의 중심에 들어가는 방식이 아니라 시의 중심에 들어가는 방식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고 할 만하다. 시가 모든 말들에서 그 조건반사의 습관을 지우고 그 순결한 울림만을 남겨놓을 때, 개인적이건 역사적이건 완성되거나
완수될 수 없었던 것들의 온갖 한은 제 응어리에서 풀려나와 일체 존재의 단일원소가 된다. 최하림의 새 시집이 아마 이로써 설명될 수
있으리라. 일종의 비인칭의 시집, 거기에는 일거수일투족이 투명한, 그래서 수식어 없이 시인이라고 불러야 할 한 사람이 있고, 깨끗한 말들에서
잔잔한 기운이 흐르는, 말 그대로의 시가 있다. 시를 타넘어가기 좋아하는 이런저런 해석들이 발받침으로 삼기 십상인 돌출부나 크랙 같은 것은 거기
없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빌미를 주는 어지러운 말본새에서도, 모범 답안을 미리 모의해둔 수수께끼 같은 것에서도 그의 시는 애초부터 멀리 있다.
그래서 그의 시에 잘 젖어들기 위해서는, 어떤 종류의 신비주의자들이 종종 주장하는 것처럼, 정신 에너지의 주파수를 한껏 낮출 필요가 있다.
느껴야 할 것은 몸을 잘못 뒤채면 금방 끊어져버리고 마는 존재의 낮은 파동이기 때문이다. 나무가 자라는 집을, 시인 그 자신이라고
여겨도 좋을 최하림의 시(「나무가 자라는 집」)가 이 파동에 대해 이야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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