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시 2018-2019

2019 무등일보 신춘 당선작

네잎 2019. 1. 6. 21:18

2019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경운기를 부검하다

 

임은주

 

 

그는 차디찬 쇳덩이로 돌아갔다

움직이지 못할 때의 무게는 더 큰 허공이다

돌발적인 사건을 끌고 온 아침의 얼굴이 퀭하다

피를 묻힌 장갑이 단서를 찾고 일순 열손가락이 긴장한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망치와 드릴이 달려들어

서둘러 몸을 빠져나간 속도를 심문한다

평생 기름밥을 먹은 늙은 부검의 앞에 놓인 식은 몸을

날이 선 늦가을 바람과 졸음이 각을 뜨는 순간,

그의 흔적이 남아있는 진흙탕과 좁은 논둑길이 나타난다

미궁을 건너온 사인(死因)에 집중한다

붉게 녹슨 등짝엔 논밭을 뒤집고 들판을 실어 나른

흔적이 보인다 심장충격기에도 반응이 없는 엔진

오랫동안 노동에 시달린 혹사의 흔적이 발견되고

탈, 탈, 탈, 더 털릴 들판도 없이 홀로 2만Km를 달려 온 바퀴엔

갈라진 뒤꿈치의 무늬가 찍혀있다

가만히 지나간 시간을 만지면

그 속에 갇힌 울음이 시커멓게 묻어나온다

소의 목에서 흘러나온 선지 같은 기름이 왈칵 쏟아진다

임종의 안쪽에는 어느새 검은 멍이 튼튼히 자리 잡았다

길이 간절할 때마다 울음이 작동되지 못하고 툴툴거린 흔적이다

죽어도 사흘 동안 귀는 열려 있다는 말을 꼭 움켜쥔

얼굴의 피멍이 희미한 눈빛부터 쓸어내렸다

이제 습골(拾骨)의 시간이다

정든 과수원 나무들이 마지막 악수를 청했는지

뼈마디마다 주저흔이 보인다고 기름 묻은 손이 넌지시 일러주었다.

 

 

 임은주

▲경기 김포 출생 ▲2009년 부천 신인문학상 ▲2014년 월간 '시와 표현' 신인상으로 등단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 과정 수료

 

 

심사평

시적 진정성 돋보여

 

 

고재종시인

 

 

  2019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출품한 시는 총 369명 1426편이었다. 꽤 높은 응모 율이었다. 한데 양적인 투고에 걸맞게 작품들의 수준도 그 감각과 사유, 표현력에 있어서 고투를 보여주는 작품이 많아 기뻤다.

 

  세계와 존재의 비밀을 캐고 인식에 충격을 주는 시, 사회의 현안문제들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시, 무엇보다도 삶과 사랑에 대한 여러 감정과 담론을 펼쳐 대며 공명의 감동을 이끌어내는 시들에 가슴이 먹먹했다.

 

  이 중 시적 표현력의 진수를 보여준 '몰골'의 김길전, 화려한 상상력을 가진 '지느러미 떼라피'의 김휼, 인생 이해의 감각적 진술이 돋보이는 '붉은'의 최재영, 그리고 서정과 인식, 공감 그 어느 것에서든 자유로운 '그 그림은 아무 것도 낳지 않았다', '경운기를 부검하다', '오래된 그릇'의 임은주가 최종적으로 겨뤘다.

 

  여기 네 사람 누구를 당선으로 밀어도 큰 문제가 없었는데, 다만 김길전은 시 전체의 유기적 통일성 확보에 실패했고, 김휼은 이미지들이 삶에 천착하지 못했으며, 최재영은 잠언 투의 문장이 거슬렸다.

 

  결국 위 문제점들을 잘 극복한 임은주로 결정되었는데, 당선작 '경운기를 부검하다'는 어느 날 사고로 박살난 경운기를 수리하며 그 경운기를 운영했을 농부의 죽음을 유추해내는 솜씨가 사유나 감각, 적확한 표현력에 있어 그 재능과 숙련도를 충분히 보여줬다.

 

  한데 이 시인의 다른 두 작품이 신춘문예용으로는 더 적합할 것도 같았는데, 나는 시적 진정성이 돋보이는 이 작품을 최종 당선작으로 밀었다.

 

  축하드리며 아쉽게 된 김길전, 김휼, 최재영도 금명간에 시인이 될 수 있는 재능을 가졌다는 것을 알려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