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2/18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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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있다. 이 문장은 단순히 지식의 양에 관한 것이 아니다. '아는 만큼'이라는 '인식'과, '보인다.'라는 '지각'의 상호관계에 대한 예리한 설명이다.
진중권의 생각의 지도는 그의 철학적, 유미적 인식에서 지각한 오늘날의 세상을 그려놓은 에세이다. 처음 책을 읽을 땐, 그가 인식한 세상이 너무나 현학적이고 복잡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결국 화자인 진중권과 독자인 나는 현재라는 시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그리고 사회적 맥락이라는 같은 지각 대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의 삶 속에서 지각되던 나의 인식에 머물던 어렴풋한 개념들을 하나하나 되짚어가며 책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 중 내게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우리 주변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슈들과 사회 현상들과 관련된 이야기들이었다. 눈물샘을 자극하는 신파가 사랑받는 이유, 희망버스와 같은 트위터와 오프라인 세계의 연결, 성형에 관한 미학적 고찰, 홍상수 영화 속 삶의 지루함 같은 것들 말이다. 고민해 본 적은 있지만 쉽게 결론짓진 못했던 많은 것들을 한 편의 정리된 문장으로 읽으며 더 풍요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제 이토록 풍요로운 관점을 장착했으니 앞으로 접할 새로운 세계들이 내게 어떻게 인식되고 지각될 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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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자신을 알라"라는 신의 인삿말과 "당신은 존재한다"라는 인간의 대답. 이 신성한 문답을 근대철학은 인간이 제 의식으로 제 존재를 증명하는 형식으로 바꿔놓았다.
보헤미안의 9계명은 그저 질식할 것만 같은 체제를 파과함으로써 새로운 삶을 구출하라는 미학적 윤리의 도발적 표현일 뿐이다.
보헤미안, 이 '창조적 개새끼'의 존재미학이 엘리트주의적이라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적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발적 빈곤을 실천한 보헤미안의 라이프스타일은 자본주의라는 욕망기계에 자발적으로 종속되어 살아가는 오늘날의 대중에게 또 다른 삶의 영감을 줄 수 있다.
르네 지라르에 따르면, 욕망은 (결핍된) 대상과 (욕구하는) 주체의 이항관계가 아니다. 욕망은 삼각형이어서 우리는 대상자체가 아니라 타인이 욕구하는 것을 욕구한다.
이상적인 경우, 이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인쇄 문화의 '이성'과 구술문화의 '감성'은 서로 편향을 견제하며 공존할 것이다.
팟캐스트 하나로 한참 사회가 시끄러웠다. 그 방송에 열광하는 이들이 진보지식인들의 한계를 지적할 때, 그들은 자신들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문자매체에 내재된 어떤 편향을 올바로 지적하고 있다. 가령 이성의 과잉, 공감의 결여, 행동의 부족, 소통의 일방성 등. 그 팟캐스트 방송의 성공은 바로 이 편향에서 비롯된 어떤 '결핍'의 결과일 것이다. 다만 기억해야 할 것은 편향은 '모든' 매체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한국처럼 파토스(pathos)가 넘치는 사회에서는 눈물의 과잉을 미학적 '오류'라기보다는 인간적 '공감'의 통로로 여긴다.
뭔가 전달하는 것(이른바 '정보')를 담지 못한 문장들은 시장에서 도태된다. 문제는 과연 언어가 그저 도구, 그것도 소통의 매체에 불과한가 하는 것이다.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하는 작업의 바탕에는 언어가 한갓 도구가 아니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들은 언어 자체가 자율적이며, 그 자율적 실체의 비밀을 밝혀내는 게 자신들의 과제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시장에서 상품이 될 수 있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정보'다.
오늘날 원본만으로는 사건이 되지 못한다. 원본은 매체를 통해 복제가 될 때 비로소 사건이 된다. 대중매체 시대에 사건을 '사건'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은 바로 '복제(가령 리트윗)'이다.
우리가 거울을 보고 자의식에 도달하듯이, 인간은 이데올로기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한다.
초현실주의에서 '낯설게 하기' 기법은 '데페이즈망'이라 불린다. 데페이브망은 '하나의 사물을 그것이 속하는 익숙한 환경에서 떼어내서 낯선 곳에 집어넣는 것'을 말한다. "해부대 위에서 재봉틀과 우산의 만남"이라는 로트레아몽의 시구는 데페이즈만의 전형적 사례다. 어떤 의미에서 뒤샹의 <샘> 역시 일종의 데페이브망으로 볼 수 있을 게다. 변기를 익숙한 맥락(화장실)에서 떼어내서 미술관이라는 엉뚱한 환경으로 옮겨놓았기 때문이다.
상상이 현실을 지배할 때 신체는 거울이 된다. 오늘날에는 신체 자체가 이상적 이미지를 투사하는 스크린이 되었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의 비밀은 (규칙으로부터의) '일탈'에 있다.
인간은 더 창조적이고 더 예민해질 수 있다. 제자리에 멈추는 건, 이 모든 기회를 무시한 치 주저앉는 셈이다. 감각을 다듬고 창조의 가능성을 온몸으로 느껴야 한다.
헤겔의 미학에 따르면, 어떤 것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자신의 '이념(규정)'에 가장 잘 합치하기 때문이다. 제 이념을 가장 잘 보여주는 놈, 가령 말을 예로 들자면, 말 중에서 가장 말 다운 놈이야말로 아름답다는 얘기다.
아무리 변증법적 '운동'을 강조한다 해도, 헤겔은 결국 '존재'의 철학자다. 그에게 '생성'이란 '아직 덜 된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관점을 뒤집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생성'을 '되다가 만 존재'로 규정할 게 아니라, 외려 '존재'를 '활동하다 멈춘 생성'이라 부르는 거다. 한마디로, 존재를 생성의 우위에 놓는 티도에서 벗어나 생성을 존재보다 더 근원적 사건으로 바라볼 수는 없을까? 철학에서 이는 곧 플라톤 주의에서 니체주의로 사고를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은 '개별자'이기에 진리를 가지나 스스로 말할 수 없고, 철학은 '보편자(개념)이기에 진리를 말하나 스스로 가질 수는 없다. 그리하여 개별과 보편, 예술과 철학은 상보적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진리는 '명제진리'와 '사태진리'로 구별된다.
근원적인 것은 이 사태진리이고, 명제진리는 거기에서 파생된 것에 불과하다. 수학을 예로 들어보자. 어떤 수학적 명제의 올바름은 정리를 이용해 증명된다. 정리의 올바름은 공리를 이용하 증명된다. 그렇다면 공리의 올마르은 어떤가? 증명없이 옳은 것으로 선포되지 않는가.
<감각의 터치>
불어에 '감각의 터치(touche des sens)'라는 말이 있다. 가령 어떤 예술작품을 본다 하자. 그때 작품이 '의미'하는 바가 아니라 그것의 색채나 형태나 질감과 같은 현상학절 질(qualia)에 사로잡힌다면, 그때 당신은 '감각의 터치'를 경험했다고 할 수 있다. 장 륑 낭시에 따르면, 예술의 본질은 그 어떤 상징체계로도 포섭되지 않는 이 터치를 전달하는 데에 있다.
터치(touch)는 동시에 감동(touch)이다.
"멈추어라! 너는 너무나 아름답도다!" 이 대사는 종종 사진예술의 모토로 사용된다. (...) 사진은 셔터가 열렸다 닫히는 그 짧은 순간을 필름위에 고정시킨다. 사진 속에 응고된 순간들은 영원성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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