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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 이라는 악기 (서영처/ 시와 음악1)music

네잎 2014. 2. 24. 21:07

바이올린 이라는 악기 (서영처/ 시와 음악1)

 

섬세한 것을 추구하려는 인간 본성이 악기를 만들지 않았을까. 바이올린은 지적인 악기이며 미학적 완성도가 높은 조형예술품이다. 18세기 이후 바이올린이 본격적으로 제작되고 독주악기로 자리 잡은 후 많은 화가들이 그들의 그림 속에 바이올린을 등장시켜왔다. 화가들은 회화의 평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작품의 미학적 완성도를 위해 청각적 요소를 그림 속에 넣으려 했음이 틀림없다. 그림 속의 악기들은 소리를 내고 있지 않으면서도 커다란 울림과 공명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바이올린은 머리, 몸통, 허리 같은 해부학적 명칭을 가지고 여성의 몸을 반영하고 있는 악기이다. 미국 작가 만 레이는 「앵그르의 바이올린, 1924」에서 여인의 등과 둔부에 흐르는 곡선을 바이올린의 풍만하고 부드러운 소리에 겹쳐놓고 있다. 나부의 미끈한 등 위에 f 홀을 마주보게 그려놓은 이 작품은 다다이즘의 유희를 대표하는 것으로, 여자의 등이 마치 두 개의 아가미처럼 호흡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켜지 않아도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있는 이 찰현 악기, 그런데 활은 어디에 있나?

현과 활이 마찰을 일으키며 만들어내는 바이올린의 미묘한 음색은 언제든 회화의 색채와 음영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이며 한 소절의 악구는 살아 꿈틀거리는 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라울 뒤피와 마티스, 샤갈의 회화에 등장하는 바이올린들, 한 편의 경쾌한 곡이나 옛 민요를 들려주며 향수를 자극하는 이 그림들은 분명 즐거운 날보다 지친 날이 더 많았을 삶이지만 그것을 긍정하고 노래한다.

라울 뒤피(1877-1953)가 그의 바이올린 연작들에서 보여주는 오브제들, 예컨대 싱그러운 이파리나 바로크식 테이블은 높은음자리표와 낮은음자리표, 포르테, 포르티시모 같은 악보 상의 기호뿐 아니라 미묘하게 휘어지는 바이올린의 선율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바로크식 테이블은 잠시 뚜껑을 닫아 둔 피아노에 다름 아니다. 이제 곧 뚜껑이 열리고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멋진 앙상블이 시작될 것이다. 음악가 집안에서 성장한 뒤피에게 음악은 전혀 의도적인 것으로 작용되지 않았다. 그의 그림 속에서 소리는 덩굴식물처럼 무성하게 피어나 공간 속으로 번져간다. 그의 바이올린들은 그림이 아니라 하나의 멜로디와 리듬이 되고자 했던 바이올린이다.

현악기들은 고대로부터 시와 노래가 끊이지 않는 영원한 봄날, 이상 세계를 추구하고자 하는 그림들 속에 꾸준히 등장해 왔다. 정물화에서도 식탁 위의 빵과 먹음직스런 과일, 꽃들과 함께 풍요로운 세계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오브제 역할을 충실히 해 왔다. 그림 속의 현악기는 더 이상 고전과 낭만이 존재하지 않는, 그리고 다시는 그 곳으로 돌아갈 수 없는 각박한 도시인들에게 잠시 아르카디아의 환상을 제공한다.

파울 클레(1879~1940)는 일찍이 바이올린을 공부하였다. 그는 음악과 미술 사이에서 방황했다. 피아니스트와 결혼한 후 그림에만 전념하게 된 클레에게 음악은 평생 중요한 활력이자 모티브가 되었다. 1922년 작 「지저귀는 기계」는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에 목매 본 사람만이 표현해 낼 수 있는 날카로운 작관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그림은 현 위에서 지저귀고 있는 새들을 그리고 있는데, 음표를 닮은 새들은 가늘고 높은 소리고 울어대고 있다. 화가는 새가 아닌 새소리를, 최고의 음역까지 올라가 더 이상 들릴 것 같지 않는 E현의 음을 그리고자 한 것이다.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파가니니 카프리스 1번이 떠오른다. 수백 년 된 명기에서 울려오는 소리, 이 소리는 수만 럭스의 빛이 쏟아지는 침엽수림을 단숨에 도심의 아파트 거실로 불러들인다.

한편 바이올린의 활과 악기는 무기가 변형된 모습을 보여준다. 방패와 창, 또는 방패와 활의 모습이다. 활은 전장을 누비던 말 꼬리털로 만든 것으로 바이올린족의 초창기 활은 전쟁터에서 시위를 당기던 활의 형태 그대로이다. 바이올린의 활은 무기의 꿈과 악기의 꿈, 그 양 극한을 달리고 있다. 작가 김훈에 의하면 악기는 비어있음의 소산이고 무기는 단단함의 소산이다. 악기는 시간의 내용을 변화시키고 무기는 세계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데 관여한다. 악기의 꿈은 무기 속에서 완성되고 무기의 꿈은 악기 속에서 완성된다. 전쟁이 빈번하던 시대에도 전시에는 병사와 무기가 필요하였지만 평화 시에는 영혼을 풍요롭게 할 음악이 필요하였다.

바이올린은 은유로 가득 찬 악기이다. 또한 인간의 모습에 가장 가까이 근접한 악기이며 인간의 목소리를 기악화 한 악기이다. 평균율로 조율되어 정확한 음정을 지니는 피아노와 달리 스스로 음정을 만들어 가는 악기이며, 오른 손과 왼 손, 턱, 어깨, 등 온 몸이 관여되어 켜는 굉장히 주관적인 악기이다. 천품이 뛰어난 바이올린 제작자들은 절제와 균형이라는 그리스 고전적 미를 이 악기에 몽땅 쏟아 넣었다. 신전을 떠받치던 도리아와 이오니아, 코린트 양식의 기둥 문양을 모방하였고, 여사제의 풍만한 몸을 모방하였다.

바이올린의 앞 판 위에서 현을 지탱시키는 브리지는 멀리서도 먹이 냄새를 감지하는 들짐승처럼 소리를 민감하게 맡는다. f홀 사이로 들여다보이는 소리기둥은 악기의 음질을 좌우하는 비밀을 쥐고 깊이 숨겨져 있다. 바이올린의 뒤판은 민첩한 맹수의 얼룩무늬를 지녔다. 열정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주하는 붉은 바이올린은 ff(포르티시모)나 sfz(스포르잔도)로 관객의 급소를 가격하여 절명시키는 듯한 공격적인 야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정경화의 젊은 시절 연주 스타일이 이러해서 동양의 암호랑이라는 별명이 붙어있었다.

<레드 바이올린>이라는 영화에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옛 이탈리아의 뛰어난 장인이 바이올린 제작 마지막 공정 단계에서 아내의 죽음을 맞는다. 그는 소리 질을 결정한다는 마지막 니스칠에 아이를 낳다 죽은 아내의 피를 섞어 바른다. 사랑하는 아내를 영원히 살게 하고 싶었던 장인의 갈망대로 죽은 여인의 혼이 깃든 바이올린은 최고의 명기가 된다.

바이올린은 매우 촉각적인 악기이다. 바이올리니스트의 손가락은 더듬이처럼 지판을 더듬어가며 변덕스런 음들을 조절한다. 마치 왼쪽 손가락들은 각각의 뇌를 지닌 듯 보인다. 이 뇌가 기억하고 있는 촉감에 의해 음정과 음질이 결정되기에 손가락의 움직임에는 예민함과 정밀성이 요구된다. 또한 왼손은 마음의 대리인이기도 하다. 강약과 섬세함, 울고 웃고 싶은 마음을 왼손이 다 대신하여 들어주기 때문이다. 바이올린의 연주는 터치의 문제이다. 비브라토 하는 현에는 부활하는 생명들의 미묘한 떨림이 있다. 바이올리니스트는 인공호흡 하듯 낡은 악보에 숨을 불어넣어 과거의 시간 속에 갇혀있던 음표들을 소생시킨다. 순식간에 만들어지는 음악적 공간은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며 숨 쉰다.

바이올린의 현은 gut로 만들어졌기에 때로 창자를 틀듯 애끓는 소리로 울기도 한다. 또한 카르멘처럼 감각적이고 관능적이며, 약음기를 붙여 연주할 때면 연인처럼 달콤하고 부드럽게 속삭인다. 간곡한 기도 끝에 신의 음성을 듣듯, 연주자의 끝없는 연습 끝에 죽은 나무로 만들어진 악기는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바이올리니스트들은 바이올린과 운명적으로 만나 사랑하고 마침내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신딸이나 무당처럼 악기와 멀어지면 몸이 아프고 우울증으로 견딜 수 없다. 오랫동안 바이올린을 배우던 학생이 공부에 전념하겠다고 악기를 그만둔 후 음악회에 왔다가 휴식 시간 로비 기둥 뒤에서 우는 모습을 우연히 본적이 있다. 그동안 악기는 그의 연인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직 마음 정리를 못하였는데 연인은 다른 이의 품에 안겨 노래 부르고 있는 것을 목격한 셈이다.

악기는 속을 비워야 공명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마음을 비우는 일에 자주 비유된다. 마음속 욕망을 비워내야 만이 인간도 악기와 마찬가지로 공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악기가 된다는 것은 보다 높은 경지로 나아가고 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라닥은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땅이다 투링은 암벽 위의 꼼빠에 산다 만류하는 어머니를 울며 졸라 열 살에 출가했다 보이는 것이라곤 눈 덮인 산과 맑은 하늘 뿐 아이는 또래의 도반과 얼음이 어는 추운 방에서 잔다 새벽에 일어나 양치를 하고 그 물 뿜어 얼굴을 씻는 아이 큰 스 님 되기가 소원이었지만 휑한 눈으로 멀리 산 아래를 한없이 바라볼 때가 있다 겨울 볕을 해바 라기하며 두런두런 경전을 읽는 아이의 팔에 소름이 돋는다 붉은 사리를 두른 이, 혹한의 여백 을 밀며 당기며 악기가 되어간다

- 「공명이라는 것」, 서영처

바이올린은 원래 가난한 이들의 악기였으며 소박한 민속 악기였다. 샤갈의 그림에서 보듯 시골 마을의 결혼식이나 토속적인 축제에서 연주되었다. 피들이나 서툰 연주자를 가리키는 피들러라는 말은 이탈리아 크레모나의 스트라디바리나 아마티, 과르네리 같은 명기와는 거리가 멀다. 바이올린은 천대 받던 유태인이나 집시들의 악기였다. 나라도 없이 떠도는 이들에게 무겁고 덩치 큰 피아노가 가당키나 한가? 바이올린은 언제든 짐을 싸서 떠날 수 있는 악기이다. 이런 피가 유구히 흘러서인지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들 중에는 유태인들이 많다. 칼 플레쉬, 크라이슬러,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유디 메뉴힌, 아이작 스턴, 하이펫츠, 아이작 펄만 뿐 아니라 물리학자 아인슈타인도 대단한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또 집시들의 음악은 화려한 기교 속에 그들 삶의 비애가 짙게 흘러들어 듣는 이들의 마음을 휘둘러 놓는다.

유럽 여행을 하다보면 지하철 통로에서 거리의 악사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을 듣게 되는 일이 이따금 있다. 무겁게 가라앉아 지하도를 흔드는 바이올린 소리는 애잔하고 우울하며 무언가 향수를 자극하는 데가 있다. 하여간 복잡하게 이어진 이 지하철 통로는 천장 높은 성당만큼이나 멋진 공명통이 되고 있었다. 자연동굴이 많은 제주도에서는 간혹 동굴 음악회가 열린다고 한다. 인공적인 지하 공간보다 동굴은 소리를 더 잘 반영하는 공명통이 될 것이다.

바이올린은 아름다움만을 연주하는 악기가 아니다. 기쁨과 슬픔, 비탄과 공포, 우울, 분노, 오만, 신경질, 우아함, 유머, 익살, 발칙함, 변덕, 수다스러움까지 삶의 온갖 모습을 그려내는 악기이다. 단순한 선율의 민요에서 악마적인 기교의 화려한 곡까지, 나른한 권태에서 번뜩이는 직관까지, 이 모든 것들이 아름다움과 결부되는 것이다. 음악이란 이런 소리들을 통해 각자의 천국을 실현하는 것이다. 음악은 현실에 묶여 저속해진 인간들의 영혼을 고양시켜 천국의 기품 있는 시민으로 승격시켜 줄 것이다. 바이올리니스트는 이런 미학들을 몸소 실천해 가는 사람들이다.

신경성 다발증으로 그녀는 연주를 할 수 없다.

바이올린이 온몸을 파고들어 울리기 때문이다.

홀로 열린 창, 밖에는 늙어 목쉰 고물상.

-여보, 나도 이제 고물이니 사감이 어떠하오?

농담은 날로 진담이 되어서 그녀는 과감하게

고물상에게 몸을 통째로 던지고 말았다.

건드릴 적마다 몸저린 고물상의 기쁨,

해는 그때부터 눈부시고 몸부신 빛이 되었다.

- 「한 바이올린 주자의 절망」, 마종하

(서영처 시인. 웹진 시인광장 2009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