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World War II, 第二次世界大戰]세계 전쟁
주요참전국은 독일·이탈리아·일본(추축국)과 프랑스·영국·미국·소련·중국(연합국)이었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1914~18)에서 패배한 뒤 영토의 많은 부분을 주변국에 빼앗기고 막대한 전쟁보상금까지 물어야 했다. 겨우 경제위기를 벗어난 독일은 재무장을 시작해 1939년 9월 기갑사단을 이끌고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선전포고를 선언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이 전쟁은 유럽 대륙 전역뿐만 아니라 태평양의 섬들, 중국과 동남아시아, 북아프리카, 세계의 바다를 무대로 전개되었다. 참전을 미루던 미국은 일본의 진주만 폭격(1941)으로 시작된 태평양 전쟁으로 전쟁에 발을 들여놓았다. 모스크바 침공에서 독일이 대패하면서 전세가 연합국 쪽으로 넘어갔다.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하여 긴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세계의 지배력이 서유럽 국가에서 미국과 소련으로 옮겨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주요참전국은 독일·이탈리아·일본(이상 추축국[樞軸國])과 프랑스·영국·미국·소련·중국(이상 연합국)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해결하지 못한 채 남겨둔 분쟁이 20년 동안의 불안한 잠복기를 거쳐 다시 폭발한 제2차 세계대전은 여러 면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연장이었다. 이 전쟁은 유럽 대륙 전역뿐만 아니라 태평양의 섬들, 중국과 동남아시아, 북아프리카, 세계의 바다를 무대로 전개되었다(→ 아시아, 아프리카). 제2차 세계대전은 20세기 지정학적 역사의 분수령으로서, 소련의 세력이 동유럽 여러 나라까지 뻗치는 결과를 낳았고, 중국에서는 공산당 정권이 수립되었으며, 세계의 지배력이 서유럽 국가에서 미국과 소련으로 옮겨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4,000만~5,000만 명의 사망자를 낸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인 동시에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었다.
사회(이영민) < 국토와 지리 정보 < 세계 속의 우리나라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1939~45년 세계 경제공황 후 모든 강대국들이 참여하는 전쟁을 일으킨 독일과 일본의 초기 침공.
1938년 3월 히틀러는 독일군을 보내 오스트리아를 점령했고, 오스트리아는 당장 독일에 병합되었다. 1939년초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점령하기로 결심했다. 히틀러는 소련과 비밀협상을 벌여, 8월 23~24일에 모스크바에서 독일·소련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서방은 독일의 침공을 외교적 노력으로 제지했지만 무시하고 1939년 9월 1일 새벽 폴란드를 침공했다. 그러자 영국과 프랑스는 9월 3일 독일에 선전포고했고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동남아시아의 유럽 식민지를 침공하던 일본은 태평양 확전(擴戰)의 주된 상대국으로 예측한 미국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1941년 12월 7~8일에 하와이 진주만과 필리핀에 있는 미국의 군사시설을 공격했다. 12월 8일 미국의회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본격적인 태평양 전쟁에 돌입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 국민의 굴욕감과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한 조항, 바이마르 공화국을 괴롭힌 사회 혼란 및 정치 불안은 극렬 민족주의와 반(反)유대주의를 지향하는 나치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을 초래했다. 1933년에 독재 권력을 장악한 히틀러는 집권하자마자 은밀히 독일을 재무장하기 시작했다. 다른 유럽 강국들이 독일 재무장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기 주저하는 것을 이용하여, 히틀러는 1936년 3월에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하고 라인란트를 군사적으로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1936년말 이미 에티오피아에서 침략행위에 들어간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로마와 베를린을 잇는 '추축'을 선언했다. 이듬해 이탈리아는 독일과 일본이 1936년에 맺은 반(反)코민테른 협정에 참여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반공이라는 명목으로 1936년부터 스페인 내란에 개입했다.
1938년 3월 히틀러는 독일군을 보내 오스트리아를 점령했고, 오스트리아는 당장 독일에 병합되었다. 1939년초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점령하기로 결심했다. 폴란드는 독일이 공격해올 경우 프랑스와 영국의 군사원조를 보장받고 있었지만 히틀러는 어떻게 해서든 폴란드를 침략할 작정이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소련이 서쪽의 인접국가가 침략당하는 것에 반발할 가능성을 없앨 필요가 있었다. 히틀러는 소련과 비밀협상을 벌여, 8월 23~24일에 모스크바에서 독일·소련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를 동서로 나누어, 폴란드 영토의 1/3에 해당하는 서부를 독일이 갖고 나머지 2/3에 해당하는 동부를 소련이 접수한다는 데 합의했다.
8월 25일에 영국과 폴란드가 정식으로 상호원조 조약을 맺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히틀러는 폴란드 침공을 며칠 연기했다. 그러나 그를 제지하려는 서양 열강의 외교적 노력을 무시하겠다는 결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1939년 8월 31일 낮 12시 40분, 마침내 히틀러는 이튿날 새벽 4시 45분에 폴란드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침공은 명령대로 시작되었다. 그러자 영국과 프랑스는 9월 3일 독일에 선전포고했고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중등 역사 하 < 현대 세계의 전개 < 제2 차 세계 대전과 냉전 체제의 형성 < 제2 차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유럽 참전국들의 전투력 브리태니커
세계 경제공황 후 모든 강대국들이 참여한 전쟁(1939~45).
1939년 9월 무렵 연합국, 즉 영국·프랑스·폴란드는 산업자원과 인구 및 병력면에서 모두 우세했지만, 독일군은 무기와 훈련, 작전이론, 규율 및 사기 때문에 그 규모에 비해서는 세계에서 가장 능률적이고 유용한 군대였다. 1939년의 전황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은 독일군 보병사단의 질적인 우세와 기갑사단수였다. 예를 들어 독일은 1939년 9월에 6개 기갑사단을 갖고 있었지만, 연합군은 탱크를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그 당시 기갑사단은 하나도 없었다. 독일 공군(Luftwaffe)도 1939년 당시 세계 최고였다. 독일 공군은 육군을 지원하기 위한 지상 협력군이었지만, 독일 공군의 항공기는 연합국이 보유하고 있는 거의 모든 유형의 항공기보다 뛰어났다. 1935~39년에 전투력을 재정비하는 동안, 독일 전투기 생산량은 꾸준히 늘어났다. 독일 해군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8월 당시보다 훨씬 불리한 상태였다. 1939년 9월의 시점에서 연합국이 독일보다 훨씬 많은 전함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의 전황
세계 경제공황 후 모든 강대국들이 참여한 전쟁(1939~45).
독일의 폴란드 침공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은 독일이 재무장을 시작하면서 채택한 작전 개념인 고속 기갑전투가 첫선을 보인 무대였다(→ 색인:기갑사단). 폴란드는 약 5,760km에 이르는 엄청나게 긴 국경을 가졌기 때문에 이런 시범을 보이기에 최적격인 나라였다. 전쟁이 일어나자, 폴란드 육군은 100만 명이라는 많은 수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폴란드 육군은 애처로울 만큼 시대에 뒤져 있었고, 탱크, 병력 수송용 장갑차, 대전차포, 대공포도 전혀 보유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폴란드군 지도자들은 대부분 기병이 폴란드 육군의 중요한 자산이며 독일의 기계화 부대쯤은 충분히 공격할 수 있다는 2가지 믿음에 매달려 있었다. 또한 이들은 폴란드 공군보다 거의 10배나 강력하고 우수한 독일 공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했다. 독일의 공격은 1939년 9월 1일에 시작되었다. 9월 중순에 이미 폴란드의 방어체제는 완전히 무너졌고 부대는 뿔뿔이 흩어져, 독일군의 공격을 받아 고립된 부대는 저마다 닥치는 대로 분투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 9월 17일 소련군이 서쪽 국경을 넘어 폴란드로 들어왔다. 바르샤바의 폴란드인들은 공포의 폭격과 집중포화를 견디며 9월 28일까지 독일군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다. 독일군은 민간인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비오듯 포탄을 퍼부어, 바르샤바 시의 상당 부분을 폐허로 만들었다. 폴란드 육군 중 마지막까지 남은 상당수의 병력이 10월 5일까지 독일군에 저항했다. 독일군은 총 70만 명을 포로로 잡았고, 폴란드 병사 약 8만 명이 국경을 넘어 중립국으로 탈출했다. 폴란드 전체 사상자(사망자·부상자·실종자) 수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한편 독일군은 약 4만 5,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어 독일군과 소련군이 폴란드에 진군했고 이들은 폴란드를 분할점령했다(→ 색인:폴란드 전투).
러시아-핀란드 전쟁
독일과 맺은 협정으로 짧은 기간에 쉽게 이익을 얻은 소련은 1939년 10월 10일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로 화살을 돌려, 그들의 영토에 소련군 수비대를 받아들일 것을 강요했다. 비슷한 요구를 받은 핀란드는 소련의 요구에 따르기를 거부했다. 소련군은 결국 약 70개 사단(약 100만 명)을 약 1,000대의 탱크를 동원해 파병하고 1939년 11월 30일 핀란드 공격을 시작했다. 침략군은 핀란드 북쪽 끝에 있는 북극해 연안의 작은 항구 페차모를 고립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들이 진격로로 선택한 모든 전선에서 굴욕스럽게 격퇴당했다. 소련의 작전계획수립자들은 핀란드 국민의 투지와, 수많은 호수와 숲이라는 천연장애물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했기 때문이었다. 서구 열강은 소련이 맛본 굴욕을 공공연히 기뻐했다. 핀란드가 초기에 거둔 승리로 히틀러의 야욕은 더욱 드높아졌고 또 서구 민주주의국가들은 소련의 군사적 능력을 과소평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 전략가들은 지난 번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모든 것을 분쇄시킬 만한 맹렬한 공격을 퍼부은 끝에, 1940년 3월 마침내 핀란드를 굴복시켰다. 핀란드는 이 전투에서 약 7만 명, 소련은 2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
유럽 서부 전선
폴란드에서 거둔 성공과 프랑스와 영국의 개입 실패로 대담해진 히틀러는 다른 나라를 정복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는 노르웨이에 약 30만 명의 주둔군을 배치했고, 이 병력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노르웨이에 남아 있었다. 히틀러는 노르웨이를 점령함으로써 스웨덴에서 독일로 들어오는 철광석을 보호할 수 있게 되었고, 필요할 경우 영국을 공격할 수 있는 해군 및 공군 기지를 얻었다. 독일군은 노르웨이에 진군하는 동시에 4월 9일에는 덴마크를 점령했다. 1940년 5월 10일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의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단숨에 휩쓴 뒤 프랑스로 진격했다. 80만 명에 이르는 프랑스 상비군은 당시에 유럽 최강의 군대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물려받은 수비적 대응자세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네덜란드 육군 역시 현대전 경험이 전혀 없었다. 독일군이 저지대국가들을 맹공하고 있다는 소식은 연합국을 경악시킴과 동시에 연합국의 운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 1가지 결과를 낳았다. 즉 영국의 총리 네빌 체임벌린이 5월 10일 저녁에 사임한 것이다. 전쟁 수행에 열의가 없는 그의 태도는 5월 7~8일 영국 하원에서 열린 노르웨이 파병에 관한 토론에서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윈스턴 처칠이 후임 총리가 되었고 그는 연립내각을 구성했다.
히틀러의 신속한 공격으로 영국 원정군의 유럽 철수에 이용할 수 있는 항구는 케르크(프랑스) 하나만 남았고, 영국 내각은 마침내 구출 가능한 병력을 최대한 구출하기로 결정했다. 영국 해군부는 병력 철수에 도움이 될 만한 온갖 종류의 소형 선박을 끌어모았다. 영국군과 함께 다른 연합군도 독일군이 됭케르크마저 점령해버리기 전에 병력을 해안으로 철수시키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철수는 5월 26일에 시작되었고, 철수 작전이 끝난 6월 4일까지 19만 8,000명의 영국군과 14만 명의 프랑스군 및 벨기에군이 구조되었다. 중장비는 사실상 모조리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구조된 병사들은 영국의 경우 대부분 전투 경험이 많은 병사들로, 연합국 전력에 귀중한 보탬이 되었다.
이탈리아의 참전
무솔리니는 프랑스가 붕괴를 피할 수 없게 된 것을 보고, 이탈리아도 비교전정책(非交戰政策)을 버려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탈리아가 독일과 맺은 협력 관계에서 확고한 이익을 얻으려면, 독일이 혼자 힘으로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을 무찌르기 전에 행동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1940년 6월 10일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알프스 국경에 약 30개 사단을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는 상태로 배치한 이탈리아는 프랑스 남동부에 대한 공격을 6월 20일까지 늦추었지만, 이 공격은 프랑스 방위군의 저항에 부딪쳐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독일의 프랑스 점령
독일군은 1940년 6월 14일 파리에 입성했고, 프랑스 서쪽 및 동쪽 변경을 따라 남쪽으로 더욱 깊숙이 진격해 2일 뒤에는 론 강 유역에 이르렀다. 6월 16일 밤 프랑스의 휴전 요청이 히틀러에게 전달되었다. 휴전 조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동안에도 독일군의 진격은 계속되었다. 1940년 6월 22일 마침내 프랑스와 독일의 휴전협정이 르통데에서 조인되었다. 르통데는 1918년에도 휴전협정이 조인된 곳이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휴전협정은 6월 24일에 조인되었다. 이 두 휴전협정은 6월 25일 아침부터 효력을 발생했다. 6월 22일의 휴전협정에 따라 프랑스는 두 지역으로 나누어지고, 그중 한 지역은 독일군이 점령하는 대신 다른 한 지역에서는 프랑스가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점령 지역은 프랑스 북부지역 전체였다. 비점령지역인 남동부 지역은 프랑스 영토의 2/5에 불과했고, 정부는 비시에 있었다. 이탈리아는 매우 관대한 조건으로 프랑스와 휴전을 맺었다. 이탈리아가 주장한 프랑스 영토는 이탈리아군이 6월 20일부터 점령하고 있었던 국경 주변의 좁은 지역이었다.
1940년 6월 프랑스의 붕괴는 영국 해군에 심각한 문제를 제기했다. 막강한 프랑스 해군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탈리아 해군도 영국과 싸우고 있었으므로 프랑스 군함들이 독일 수중에 들어가면 해군력의 균형이 추축국 쪽에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기울어질 것이기 때문에, 독일이 프랑스 군함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전략적으로 영국에 엄청난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 영국은 프랑스 군함이 '해상 감시와 기뢰 제거 작업'에만 사용될 것이라는 프랑스 정부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 그리하여 1940년 7월 3일 영국군은 영국이 통제하고 있는 항구에 정박해 있는 모든 프랑스 군함을 압류했다. 프랑스 해군은 저항하는 시늉만 했다.
영국과의 공중전
프랑스 점령으로 히틀러는 이제 유일하게 남은 적인 영국 쪽으로 병력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영국해협의 보호를 받고 있어서 막강한 독일 육군이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1940년 7월 16일 히틀러는 영국 침공 계획을 마련하고 필요하다면 그 계획을 실행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그러나 영국의 막대한 해군력을 고려하면, 독일이 전투 지역에서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어야만 육해공군이 합동으로 영국을 침공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하여 독일 공군의 총수는 8월 2일에 '독수리의 날'이라는 훈령을 내리고, 공중에서 몇 차례 강력한 공습을 가하여 영국 공군력을 파괴함으로써 영국 상륙 작전의 길을 연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공중전은 영국군의 승리로 끝나 히틀러는 영국 침공을 무기한 연기했다. 영국 공군의 승리는 영국이 살아남고 전쟁이 연장됨으로써 결국 나치 독일을 무찌르는 데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주었다. 영국의 저항 때문에 히틀러는 계획을 바꿨다. 그는 원래 1943년에 소련을 기습할 계획이었으나 1940년 7월 영국이 저항을 계속할 뿐만 아니라 미국이 독일에 대해 점점 더 비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보고, 1941년 5월 소련의 유럽 지역 점령 작전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독일의 막강한 힘을 영국에게 과시하고 미국이 유럽에 개입하는 것을 단념시키기 위해서였다.
중부 유럽 및 발칸 지역
그러나 그 사이에 일어난 사건들 때문에 히틀러는 다시 한번 계획을 바꾸어야 했다. 히틀러는 소련 침공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 슬로바키아와 헝가리를 거쳐 루마니아까지 독일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싶었다. 그는 루마니아의 유전을 소련의 공격에서 지키고 루마니아의 병력을 독일 합동군에 편입시킬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40년 11월 이탈리아가 그리스 침공에 실패한 뒤, 히틀러는 헝가리·루마니아·슬로바키아를 추축국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불가리아는 1941년 3월에 추축국에 가담했다. 4월에 독일은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를 공격했다. 1941년 4월 6일 동시에 전개된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 공격은 독일이 그때까지 치른 전투와 똑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4월 22일 그리스 육군이 항복했고 5월 11일까지 독일군은 그리스 본토 전역과 크레타 섬을 제외한 에게 해의 그리스 섬들을 모조리 점령했다. 그리스에 주둔해 있던 영국군 5만 명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들은 탱크를 비롯한 중장비를 모조리 내버린 채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황급히 철수했다.
유고슬라비아 전투에서는 유고슬라비아 육군 34만 명이 독일군에 포로로 잡혔다. 그리스 전투에서는 22만 명의 그리스군과 2만 명의 영국 및 영연방군이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발칸 지역 전투에서 독일군은 통틀어서 2,500명의 사망자와 6,000명의 부상자 및 3,000명의 실종자를 냈다. 그리스 왕국과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정부는 그들의 군대가 무너지자 망명길에 올랐다. 점령국 처리문제는 추축국들의 뜻에 맡겨졌다. 유고슬라비아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즉 1941년 4월 10일 독립을 선언한 크로아티아는 영토가 더 넓어져 대(大)크로아티아가 되었고, 독일인들은 1941년 8월 세르비아에 괴뢰정부를 세웠다.
그밖의 전선
발칸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영국 지상군이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북아프리카에서 거둔 최초의 대승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1940년 6월 이탈리아가 영국에 선전포고했을 때, 키레나이카(지금의 리비아)에는 거의 30만 명에 이르는 이탈리아군이 있었다. 이탈리아군은 중동 지역의 영국군 최고 사령관 아치볼드 웨이벌 경이 이집트에 배치한 3만 6,000명의 영국군과 대치해 있었다. 웨이벌 경은 선제 공격을 가하기로 결정했고, 약 3만 명의 영국군은 서쪽으로 진격하여 8만 명의 이탈리아군을 공격했다. 영국군은 병력면에서는 수가 훨씬 적었지만, 이탈리아군이 탱크 120대를 보유한 데 비해 275대의 탱크를 갖고 있었다. 3일 만에 영국군은 4만 명의 포로를 잡았다. 그러나 그리스 정부가 이집트 주둔 영국군을 그리스로 파견하겠다는 처칠의 제의를 받아들이자 조기 진격은 위험해졌다. 이집트 주둔군이 그리스로 빠져나가면 북아프리카의 영국군 전력이 크게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병력의 감소가 중대한 결과를 낳은 것은 히틀러가 2월 6일에 젊은 장군 에르빈 로멜을 2개 기계화 사단의 지휘관으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이 기계화 사단은 이탈리아군을 돕기 위해 되도록 빨리 아프리카로 파견될 예정이었다. 로멜은 아프리카에 도착해 공세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크게 줄어든 웨이벌 경의 영국 병력에 맞서 그는 순식간에 눈부신 승리를 거두었다(→ 색인:북아프리카 작전).
웨이벌 경이 그전에 북아프리카에서 거두었던 멋진 성공은 독일군에 대항하여 발칸 전선을 형성하겠다는 처칠의 집요한 구상 때문에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그리스 때문에 키레나이카를 잃은데다 그런 희생을 치르면서 도와준 그리스마저 아무런 소득 없이 독일군에 빼앗기자, 처칠은 분함을 참지 못하고 1941년 여름에 웨이벌 경을 해임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웨이벌 경이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에서 거두었던 승리는 수에즈 운하를 남쪽에서 위협하는 요소와 케냐를 북쪽에서 위협하는 요소를 한꺼번에 제거한 중요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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