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압정의 날들 /하린

네잎 2019. 5. 6. 23:09

압정의 날들

 

하린

 

어느 날은 서랍 속에 녹슨 압정이 너무 많아 입안이 불편했는데

 

메모판에 혀를 꽂고 말리는 상상을 하고 싶었는데

 

오래 전엔 내가 매달아 놓은 어머니에게서 어떤 기념할 기미도 없었는데

 

일정은 늘 빡빡하게 웃으며 흰수염고래나 노간주나무를 불러들일 틈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마감할 수 없는 마감일을 예약하기 시작했는지 궁리는 늘 궁한 변명처럼 느껴지곤 했었는데

 

단 한 번도 미래가 그림자보다 선명한 능력을 보여주지 않아서 밤을 낮보다 더 신봉했었는데

 

오지 않는 사람을 탓하지 않으려는 순간, 늦게 도착한 한쪽 발을 추궁하지도 읺았는데

 

찔린 눈동자에선 선홍 피 대신 선홍녹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는데



시집『1초 동안의 긴 고백』2019. 문학수첩

 하린 시인

 

2008년 『시인세계』 시 등단,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연구서 『정진규 산문시 연구』창작이론서 『시클』이 있음. 중앙대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음. 중앙대, 한경대, 광주대, 협성대, 서울시민대, 열린시학아카데미, 고양예고 등에서 글쓰기 및 시창작 강의. 계간 『열린시학』 부주간을 맡고 있음.  2011년 청마문학상 신인상, 제1회 송수권시문학상 우수상, 2016년 한국해양문학상 대상을 수상했음. 『시클』이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16년 우수출판콘텐츠제작지원 사업에 선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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