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양미술의 흐름을 알고싶어요[원시시대~현대시대까지
- 1. 원시미술 - 신비에 싸인 기원 위의 제목의 원시(Primitive)라는 용어는 '미개인' 또는 그들이 우리보다 단순해서가 아니라 모든 인류가 거쳐온 문명 이전 상태에 보다 가깝기 때문이라는 뜻에서 사용한다.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진 미술작품들 중에서 가장 오랜 된 것은 구석기 시대, 즉 지금으로부터 약 1만5천년전의 동굴에서 살았던 사람들에 의해 그려지고 조각된 것들이었다. 그들의 작품창작의 궁극적인 목적은 주술적인 것으로 사료된다. (원시인들은 무엇이 그림이고 무엇이 현실인지를 잘 분간하지 못했던 것 같다.)창에 찔린 동물들을 보면서 동물보다 자신들의 우월감을 확인하고 공포심을 제거하여 자신있는 사냥을 하려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또한 그들은 주술적인 힘을 빌리려 하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괴이한 모양의 물건들에 자신의 상징을 새겨 넣는 과정에서 이른바 부조라는 것을 창조하게 되었을 것이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기원전 15,000~10,000 오스트리아)에서 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사항(풍요와 다산이 아닐까?)을 작품에 실어서 표현한 것임을 추측 할 수 있다. 빌렌도르프 비너스 Willendorf, Venus of(기원전 25000∼20000) 1909년 오스트리아의 빌렌도르프에서 발견된 구석기시대의 여성나상(女性裸像). 빈의 자연사박물관 소장. 빌렌도르프에서 발견된 7개의 구석기시대 유적 중에서 제2의 9층(層) 문화층에서 발견된 것으로, 발견된 여러 개의 유물 중에서도 가장 알려져 있다. 여성나상은 2개가 출토되었는데 하나는 높이 10.3 cm의 석회암제이고, 다른 하나는 19 cm의 상아제이다. 유방·복부·둔부 등이 극단적으로 과장된 이 나상은 생식·출산(풍요다산)을 상징하는 주술적·원시적 숭배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작 시기는 오리냐크기(期)에 속한다. 이 중에 현저한 유적들은 1912년에 프랑스에서 베구엥이 발견한 뒤끄·도두베르 동굴, 1923년에 가스트레가 발견한 몽떼스빵 동굴, 1927년에 마르땡이 답사한 르·로끄·드·세르 동굴등이다. 그리고 1940년에 이 고을의 소년들이 발굴한 라스꼬 동굴은 유명하다. 예술이란 항상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과 관련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그 사물에 대해 느끼는 방식과도 관련되어 있다. 그림을 그릴 때에도 일반적으로 지식과 감정이 동시에 작용하기 때문에 화가가 보고 또 알고 있는 것에 흥미를 가지는가, 아니면 느낀 것에 더 흥미를 가지는가에 따라 그림도 각각 달라지는 것이다. 인류가 채집경제에서 벗어나면서 질서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때부터 종교를 발생시키게 된다. 이와 같은 급격한 변화를 혁명이라 부르고 있다. 당시의 작품, 스톤 헨지 (기원전 15~19세기경, 영국)는 우리에게 어떤 경건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면서 초인적인 것을 느끼게 한다. (스톤헨지는 태양숭배의 기념물이다.) 이와 같은 작품의 창작 동기와 작업에 있어서의 노동력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동기가 되는 힘은 바로 종교적인 것이었을 거라는 짐작을 하며, 여기서 그들은 일상을 지배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과거 신석기나 구석기 시대의 작품들이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원시시대의 미술 또한 우리에게 생활과 연계하는 많은 단서들을 제공하고 있다.원시적 주술의 유효성을 보이는 사나움은 구석기 시대의 수렵 주술에 있어서의 현실에의 충실함과 마찬가지로 필요불가결한 것이었다. 영웅들이 상징하는 그 의미를 상기함으로써 우리는 미래에 대한 믿음을 굳게 하는 것이다. 당시에 있어서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새를 머리에 얹은 남자상(BC 19~20C, 뉴기니의 세픽강유역), 수호자상(19~20C, 가봉)을 예로 들 수 있겠는 데, 이들의 공통점은 그 시기에 있어서 정령이 깃드는 곳이라는 믿음을 지녔던 곳이 머리였음을 알 수 있다. 2. 이집트 미술 - 영원을 위한 미술 (B.C.3000 ~ 300) 기원전 5000년경에 이집트, 인도, 중국 등지에 흐르고 있는 나일,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인더스, 황해등의 비옥한 유역에서 각기 거창한 문명이 바야흐로 싹트기 시작하고 있었다.이곳들을 중심으로 왕이 통치하는 고도로 조직화된 국가가 탄생하게 된다.또한 도시와 문화가 발전하게 된다. 이집트에서는 선사시대로부터 유사시대로의 생활양식의 전환이 놀라울 정도로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다.그들의 최고의 작품은 역시 회화였다.이 작품들을 볼 때, 형상에 거의 사실성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음영효과가 없고, 벽에 밀착된 것처럼 평면적이고 형상의 세부묘사가 생략되어 있다. 약화법으로 간단히 그려진 단순화된 형상들은 서로 겹치지 않게 배치되어 있다.이집트인들의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관념없이 이집트 미술을 이해하기란 힘들다.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혼은 사지의 육체를 떠나 따로 삶을 누린다고 믿었다. 따라서 사후생활에 있어 영혼이 돌아올 수 있는 육체가 필요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해서 이집트인들은 미이라를 만들고 천으로 그것을 싸서 아무에게도 방해되지 않을 견고한 관에 넣었다.또한 이집트인은 죽은 사람의 영혼도 살아있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생활용품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었기에 일상의 자재도구등을 분묘에 비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분묘에 매장이 불가능한 것은 묘실의 벽에 그림으로 그렸다.이처럼 고대 이집트에서는 분묘가 건축, 조각, 회화의 거의 모든 것을 독점하다시피 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이집트 미술은 문자 그대로 死者를 위한 미술이라 할 수 있다. 중왕국 시대에 히크소스족의 침입으로 테베라는 도시를 제외한 전 이집트의 지배권이 넘어갔다.그러나 기원전 1570년경 테베의 군주들은 침략자를 축출하고 이집트 전토에 통일된 지배권을 되찾았는데, 이와 같은 이집트 황금시대의 도래를 신왕국 시대라고 일컫는다.이 시대의 미술의 특징은 2000년 전에 정립된 회화 및 조각의 엄격한 규칙을 답습하고 있기는 하나, 때로는 대담한 자유를 보여주고 있다.또한 규모에 있어서 아주 큰 것이 있는가 하면, 섬세하고 우아한 작품도 엿볼 수 있다.헤시라의 분묘에서 보았던 법칙을 따르고 있는 작품이 발견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전작에서 발견되지 못하는 역동적인 움직임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전의 미술 작품을 지배하고 있던 모종의 질서에 대해 상당부분 자유로와 졌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또한 측면과 정면 시선이 서로 교차되고 있었던 고왕국 시대의 작품에 비해, 측면 시각의 사용을 억제한 작품도 등장하고 있다.아크나톤 시대에 있어서 이러한 양상은 더욱 두드러지는 데, 이는 수도를 옮기면서 활기찬 새로운 양식의 미술을 장려하였다. 아크나톤의 부조상을 보게 되면 이러한 과정을 극명하게 드러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양식의 변화는 아크나톤의 왕비였던 네페르티티의 흉상에서도 볼 수 있다.채색되어 있는 이 작품에서 우리는 자연스러움과 사실적인 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아크나톤 Akhnaton (?~?) 이집트 제18왕조의 제10대 왕(재위 BC 1379∼BC 1362). 이크나톤·아멘호테프 4세라고도 한다. 아멘호테프 3세의 아들이며 왕비는 네페르티티이다. 당시 이집트는 아시아에까지 세력을 펼쳤으며, 나일 계곡에는 많은 외국인이 생활하고 있었다. 왕은 모든 민족에게 공통의 세계종교를 이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노모스[州]에도 속하지 않는, 태양을 상징으로 한 유일신(唯一神) 아톤을 신봉하였다. 그러나 수도 테베는 주신(主神) 아몬의 사제(司祭)들이 권력과 막대한 부(富)를 누리고 있었으므로 왕은 종교개혁을 단행하였다. 즉, 치세 6년째에 자신의 이름을 ‘아톤에게 이로운 자’라는 의미인 아크나톤으로 개명하고 테베를 버린 다음, 새 수도를 텔 엘 아마르나로 옮기고, 아케트 아톤(아톤의 지평선이라는 뜻)이라 이름 붙였다. 그리고 전국의 신전·기념비·무덤에서 아몬의 이름을 지웠다. 왕은 명상에 빠지고 아톤 찬가의 제작과 예술활동에 전념하였으나 왕의 이상은 이해받지 못하였다. 그가 죽은 후, 아몬 신앙은 부활하였으며, 수도는 다시 테베로 옮겨졌다. 그러나 자연과 진실을 중시하는 아톤의 가르침은 사실적이고 명쾌한 성격의 아마르나 예술을 탄생시켰다. 이러한 양식은 이크 응 아톤의 타계 후에 다시 아몬 신관들이 득세 했을 때에도 볼 수 있는 데, 그 예가 바로 투탕카멘의 묘이다. 투탕카멘 Tutankhamen (BC 1370~BC 1352 ?) 이집트 제18왕조 제12대 왕(재위 BC 1361∼BC 1352). 정확하게는 투트 앙크 아멘이라 한다.제10대 왕 이크나톤(아멘헤테프 4세)의 아우 또는 조카라고도 하는데, 출생에 관해서는 확실하지가 않다. 제11대 세멘크카라는 만년에 이크나톤과 공동통치를 펼쳤으나 재위 3년 만에 죽었기 때문에 9세에 즉위하였다. 왕비는 이크나톤과 네페르티티의 제3왕녀인 안케센아멘이다.왕은 처음에는 아텐 신앙을 나타내는 투트 앙크 아텐으로 칭하였으나, 즉위 4년째 아멘 신앙을 나타내는 투트 앙크 아멘으로 개칭하고 수도를 아마르나에서 테베로 옮겼다. 연소한 투탕카멘이 당시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중신 아이와 노장 할렘헤브(모두 후에 국왕)의 보좌에 힘입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18세의 젊은 나이에 죽은 왕의 죽음에 대한 의혹은 풀리지 않고 있으며, 업적에 관한 기록도 남겨지지 않아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왕묘가 테베의 서쪽 교외인 ‘왕가의 계곡’에 조영된 탓으로 이 묘가 발굴되면서부터 유명해졌다. 3. 메소포타미아 기원전 3500년경에서 3000년에 걸친 기간에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을 낀 비옥한 땅에서 수메르인들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태동시킨다.수메르의 도시국가는 모두가 신의 소유로서 신에 의해서 통치되고 있었다. 그래서 신을 대신하고 있는 신관이 모든 국가의 행정을 통치하고 있다. 이에 영향을 받은 메소포타미아 미술은 신전을 중심으로 한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수메르의 조각은 건축보다 많은 양의 작품을 아직까지 남기고 있는 데 그것이 바로 돌로 된 소형 인물상군이다. 수메르의 조각가는 소재에 있어서 금속이나 나무를 소재로 하여 작품을 만드는 경우가 유연하고 부드러우며 사실적인 표현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이집트 미술가와 비교하여 훨씬 규칙에 속박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최초의 문자시대, 수메르 문명 아카디안왕조 우르 왕조 바빌로니아 문명 아시리아 문명 신바빌로니아왕국 페르시아 제국 B.C.3500 B.C. 2350 B.C. 2150 B.C. 2000 B.C. 900 B.C. 612 B.C. 538 B.C.331 4. 바빌로니아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 위치한 이라크의 남부를 바빌로니아라고 했다.최초의 주민들은 수메르 인들로 기원전 3천년 이전부터 문자를 발명해 그들의 문화와 종교·예술을 고대 서아시아 전역에 전파시켰다. 수메르 인들은 전반적인 생활양식뿐만 아니라 예술·종교·문학에 있어서도 고대 동방의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었다. 바빌로니아에서는 예술가와 장인의 구별이 없었으며 그들은 모두 존경을 받았고, 그들의 기술을 지혜의 화신인 에아신에게서 부여받았다고 생각했다. 기원전 3천년 초 바빌로니아의 도기 제작은 이미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앗시리아의 아르파시야와 이란의 수사에서 출토된 도기는 모양도 아름답고 채색한 장식의 취향과 기술도 뛰어났던 것을 보여준다. 바빌로니아의 건축에는 진흙과 짚으로 만든 벽돌과 삼목이 주재료로 사용되었다. 궁전이나 신전의 외벽은 화려한 장식을 붙여 치장했으나 내구성이 없는 진흙 벽돌로만 되어 있어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므로 바빌론의 건축물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바빌론 건축의 특징적인 요소는 약간 튀어나온 버팀벽이 달린 정면과 계단을 쌓거나 삼각형 모양으로 된 수직의 수로와 총안이다.또 가장 독특한 건축물은 '지구라트'라고 하는 거대한 계단식 탑이다. 이것은 모든 주요 신전에 필수적인 것이었는데 거대한 진흙 벽돌을 층층이 올라갈수록 점점 작아지게 쌓고 꼭대기에는 성전을 만들어 바깥 계단으로 가게 되어 있다. 기원전 2500년경에는 팔장을 낀 자세의 자연스러운 환조 석회석상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바빌로니아 돌 공예의 진정한 매체는 저부조이다. 벽화와 함께 발달한 이 부조는 채색이 되어 있으며, 입체적 효과를 덧붙인 정교한 벽화의 변형이다. 벽화는 고운 바탕의 흰색 석고벽에 검은색으로 윤곽을 그린 다음 붉은 색과 검은색과 칠했으며, 청·황·녹색을 제한적으로 사용했다. 벽화는 전형적인 왕실 의식·제사·서임식·사자의 사냥 장면등을 묘사한 것으로 릴리프에서와 같이 인습에 따라 머리와 다리는 옆 모습, 몸통은 앞 모습이며 눈은 보통 앞을 바라보고 있다. 바빌로니아 고유의 특징적인 조각은 매우 단단한 돌로 만든 작은 원통형 도장에 무늬를 조각한 '미니아튀르'이다. 기원전 5천∼3천년 사이에 거의 보편적으로 사용된 이 도장은 서 아시아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발달 순서가 분명히 나타난다. 가장 훌륭한 작품들은 아카드 시대에 제작된 것들로 주제도 흥미롭고 완성품의 아름다움도 뛰어나다.그 외에 조개나 유리·돌·상아로도 모양을 만들고 조각을 해서 큰 작품을 장식하거나 모자이크 조각으로 사용했다.동이 사용된 예는 유사 이전에도 발견되었으나 많은 양을 사용하고 또 장식용으로 금속을 쓴 것은 바빌로니아인들이 최초였다. 그들은 금·은·동으로 많은 작품을 제작했으며 처음에는 망치로 두들겨 펴서 만들었으나 나중에는 청동 적조물로 신전이나 궁전 입구에 괴물상을 만들어 세우기도 했다. 5. 앗시리아 (기원전 1,000년경 ∼ 612) 앗시리아 미술은 메소포타미아 미술의 슈메르·악카드의 전통을 잘 소화시켰고 그 위에 전혀 다른 경지를 열어 고대 오리엔트 미술에 하나의 새로운 유형을 명확히 창조해 그 지리적인 환경에 따라 시리아, 소아시아, 더 나아가 에게해 주변의 미술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앗시리아 미술의 새 경지란 공적과 권위를 과시하는 것이어서 외정(外征), 향연, 사자사냥등을 주제로 한 묘사가 아주 구체적이며 기록성을 중시했다. 특히 동물의 표현에는 박진감 넘치는 사실성을 발휘하고 있다.현실주의 스타일로 강력한 힘의 표현을 하였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생에 대한 억척스러운 집착을 고집하는 성격을 이런 앗시리아 미술에서 볼 수 있다. 6. 에게 미술 에게 해는 크레타 섬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만이며, 에게 미술은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생성된 미노스 문명의 해양 미술 문화이다. 그들은 배를 타고 다니며 경제활동을 하였고, 따라서 사치를 좋아하고 쾌락적이었다.이 습성이 미술에도 반영되었는 데, 대표적으로 투우사의 프레스코 라는 작품이 미노스의 궁전에서 발견되었다. 미노스 문명이 그리스 영토의 미케네에 영향을 미쳐 생성된 것이 미케네 문명이다. 미케네의 궁전은 미노스와는 달리 요새화 되어 있으며 견고한 벽면과 큰 돌로 축조되어 있다. 미케네의 사자문은 이러한 양식을 극명히 나타내고 있는 건축물로, 상부에 입구를 지키는 거대한 돌로 된 두 마리의 사자 부조가 새겨져 있다. 7. 그리스 미술 북방에서 그리스 본토로 이동해 온 도리아족은 선주 민족을 정복하고 이들의 문화에 이집트 문화의 영향을 더하여, 서양 문화의 모체인 눈부신 그리스 문화를 만들었다.그리스인은 초기에는 이집트인처럼 형태를 중시한 개념적인 작품을 만들기는 했어도 생각하는 근본에는 인간의 모습으로 생각했고, 또 세계 최초의 민주정치를 발명한 그들의 마음 밑바닥엔 현실의 인간을 모든 세계관의 척도로 하는 사고법이 있었다.이 정신이 미술을 형식주의에서 탈피시켜 바로 자연주의에로 이행시켰던 원인이었다.그리스 미술의 특징은 이상미, 조화미, 균형미를 추구하고 인간 중심 사상이 바탕이 되었다는 것이다. 건축으로는 신전 건축이 중심이고 조각은 수학적인 비례에 의해 인체의 이상미를 추구하고자 했다. 그리스 미술은 서양 미술의 근원이라 칭한다. 그리스 미술은 세 시기로 구분한다. 1. 아르카익 시대(기원전 7세기~6세기)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의 아르카익 시대에는 소박하고 신선한 미를 추구했다. 소아시아, 이집트의 영향을 받은 인상 조각으로 대표된다. 정면성의 법칙, 치졸한 안면 표정, 이른바 아르카익 스마일이라 불리는 미소를 특색으로 한다.아르카익 초기의 조각은 강한 정면성(正面性)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훗날 그리스 조각이 개척한 충실한 관찰에 기초하는 자연적인 표현과 거리가 멀다. 육체의 각 부분의 조립을 사실에 입각한 묘사적 의지에 의하기 보다는 견고한 형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구축적 의지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 개발 정신으로 현대 문화의 중요성을 깨달아 그 미술을 탐구하고, 도입한 선구자들은 코레의 '소녀상', 코우로스의 '청년상' 등이 대표적이다. 아르카익 시대 중기로 가면 주제와는 관계없는 가로 기어 다니는 뱀이나 괴수를 박공벽 끝의 좁은 공간에 넣어 공간을 해결하였다.이 시대의 말기로 가면 그리스 미술 특유의 충실한 관찰을 기본으로 한 묘사가 더해져서 아르카익 초기의 구성주의는 뒤로 밀려 나갔다.그것은 아르카익 스마일의 소실이고, 유각(遊脚)의 탄생이었다. 2. 클래식(고전) 시대(기원전 5세기~4세기) 기원전 5세기에서 4세기의 클래식(고전) 시대에는 조화미, 이상미를 추구한 그리스 미술의 전성기였다.아르카익에 나타난 그리스인의 창조력은 클래식 시대로 가면 묘사주의의 확립을 가져왔다. 이 클래식 시대의 전기에는 저명한 3인의 조각가가 있었다. 뮈론, 페이디아스,폴뤼클레이토스이다.뮈론은 운동의 순간적인 자세를 표현하는데에 재능을 발휘했다. 감정의 절제된 운동미를 잘 표현한 '원반 던지는 사람' '아테네와 마르쉬아스'에서 볼 수 있는 뮈론의 의도는 예리한 관찰에 의해 인체의 구조를 밝히며 그것을 묘사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페이디아스는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신 그것을 나타냈다'라고 할 정도로 칭찬되었는데 조각의 형태를 통해서 그 배후의 정신을 표현하려고 했다.'파르테논 신전의 장식 조각', '렘노스 섬의 아테네 여신상', '아테나·렘니아'는 이런 페이디아스의 특질을 잘 표현하고 있다.페이디아스의 이런 정신 내용을 드높이려는 이상주의에 대해서 외형의 이상미를 추구한 것이 폴뤼클레 이토스이다. 그는 인체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두부가 전신의 7분의 1일 때 드러난다고 하여 '창을 든 사람' '승리의 머리띠를 매는 사람'을 만들었다. 미를 수치로 나타내려는 데에 그리스인의 이지적·합리적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 신전 건축은 장중하고 남성적인 도리아식과 우아하고 여성적인 이오니아식 신전이 발달되는데 도리아식의 대표적인 것으로 익티노스가 설계한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데 파르테논 신전은 페이디아스의 조각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이오니아식 신전의 대표적인 것으로 '에렉테이온 신전' 과 '니케 신전' 이 있다. 3. 헬레니스틱 시대 기원전 3세기에서 1세기의 헬레니스틱 시대는 세속적이고 감성적인 화려한 미를 추구했다.격동적이고, 극적이고, 관능적인 것은 클래식 시대와는 다른 방식이다. 자연이나 현실의 관찰이 세밀해지고 사실 묘사가 행해져 초상 조각이 발달하기도 하고, 소재 범위도 확장되어 노인·다른 인종 ·동물들과 그 밖에 세속적인 것들이 다루어진다.관능적인 묘사로서는 많은 비너스 상이 있는데 헤르메스와 '크니도스의 비너스', 밀로섬에서 출토되어 8등신의 비례미를 잘 표현한 '밀로의 비너스'가 있다.운동감을 주는 표현으로는 사모트라케에서 출토되어 날개·옷주름등을 이용하여 움직임의 착각을 강조한 '니케 여신상', 격정의 표현으로는 '라오콘 군상', '페르가몬의 제우스 제단의 부조', 다른 인종과 결합한 것으로는 '죽어가는 갈리아 인', '자살하는 갈리아 인과 그의 부인' 등의 조각이 있다. 헬레니스틱 문화는 서로는 로마에 유입되어 서양 문화의 주류를 이루고, 동으로는 인도에까지 이르러 간다라 미술과 아쇼카 왕 치하에서의 불교 미술을 탄생시킨다. 8. 로마미술 (기원전 1,000년 ∼ 395) 그리이스 패권을 둘러싼 알렉산더 대왕에 의한 헬레니즘 제국과 카르타고의 싸움이 치열할 무렵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작은 마을에서 출발한 로마 공화국이 그리이스인들보다 정치력과 군사적으로 우세한 힘을 기르기 시작하여 마침내 그리이스를 정복하기에 이른다. 로마인들의 그리이스 세계정복은 평소 그리이스 미술에 절대적 동경을 가지고 있던 로마인들에게 그리이스의 미술을 단번에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그들의 우수한 문화 유산을 바탕으로 로마인들은 국제적 성격을 띤 미술을 전파하게 된다. 그리이스와 로마 미술이 매우 유사하게 보이는 것은 로마 시대때 활동하던 미술가들이 대부분 그리이스 출신이던가 거기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고, 로마인들은 그리이스 시대의 미술품을 복제하거나 수집하였다.그러나 로마인들이 그리이스 미술을 그대로 복제한 것만은 아니고 그들의 필요에 따라 그리이스 형식을 변형하였다. 로마인들은 멀리 북아프리카, 영국, 스페인, 페르시아만, 카스피해까지 그 들의 우수한 유물을 남기게 되었다. 1. 건축 로마인들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로 토목공학을 얘기할 수 있다. 그들의 건축은 공중목욕탕, 도로,수로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렇게 거대한 건축물은 그들의 정복자로서의 자신감과 실용적 가치를 추구한 일면을 엿보게 한다. 예로 콜로세움은 로마 건축 중 가장 유명한데, 이것은 거대한 투기장으로 내부에 계단식 관람석을 받쳐 주는 아치들인 세개의 층 각각에 로마인들은 그리이스의 세 가지 건축양식을 사용한다. 이것은 로마식 구조와 그리이스 형식과의 결합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이고 이 후의 건축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 이 건축물에 아치와 궁륭을 사용했다는 것은 로마인들의 또다른 업적이다. 2. 조각 로마인들은 주로 그리이스의 조각을 모방, 수집하여 그들의 화려한 저택을 치장하는 데 사용하였다.로마의 조각은 초상 조각과 설화적 부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먼저 초상 조각에서 그들은 전쟁 영웅의 두상을 신성의 지배력을 지닌 모습으로 표현, 영웅적으로 이상화하여 제작하였다. 헬레니즘 시대의 초상이 인물의 미묘하고 심리적인 묘사에 치중하였다면 로마의 초상조각은 훨씬 사실적이고, 치밀했으며 정확하고 의지력 있는 개성적 표현에 중점을 두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선조의 모습을 미이라로 만들던 풍습과 연관된 듯한 관심이 로마에도 있었는데 그것은 사자의 초상을 밀랍으로 만들던 것이었다. 이것은 나중에 더 견고한 대리석으로 초상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로마인들은 그리이스인보다 더 실물처럼 있는 그대로의 초상제작에 힘썼다. 설화적 부조에서는 로마의 황제들이 전쟁에서 승리한 역사적 사건을 과시하기 위한 기록으로서의 면을 보여준다. 그리이스 인들이 신전의 프리즈에 새겨넣었던 주제가 일상적인 행렬이었다면 로마인들은 일시적 사건을 다룸으로써 로마 조각가들의 예술적 의도가 기록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또한 로마인들은 부조제작에 있어서 환조처럼 느껴지게 하는 깊이감 있는 작품을 제작하기도 한다. 3. 회화 로마인들이 제작한 회화는 남아 있는 것이 없으나 그당시 로마의 통치하에 있었던 이집트에서 발견된 유물로 로마의 회화를 짐작해 볼 수 밖에 없다. 조각에서 처럼 회화에서도 그리이스의 화가나 최소한 거기서 교육받은 사람에 의해 제작되었을 가능성으로 보아 그리이스 회화의 특성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이집트의 파이윰에서 발견된 소년의 초상은 납화법으로 그린 패널화인데, 이것은 내구성이 강한 엔카우스틱 기법(납화법. 뜨거운 납을 섞은 안료로 그린 그림을 말한다.고대 회화의 중요한 기법으로 기원전 4세기경 파우시아스가 완성했다. 주로 천정의 패널에 조그마한 인물들을 그릴 때 사용했다.) 으로 색채가 밝고 생생하다.이 기법은 로마 벽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명 프레스코(벽화를 그릴 때 쓰는 화법, 이태리어로 신선하다 는 뜻. 덜마른 회반죽 바탕에 물에 갠 안료로 채색한 벽화. 그림물감이 표면에 애어들면 벽이 마르면 그림은 완전히 벽의 일부가 되어 물에 용해되지 않으며 수명도 벽의 수명만큼 지속된다. 석고가 마르 기 전에 빨리 그림을 그려야 하며 그림의 수정도 불가능하다. 기념 건조물의 벽화 그리기에 적합하다. 건조한 지방에서 가장 영구적. 이탈리아에서 많이 사용 ) 와 함께 벽장식에 이용되었다. 로마 벽화는 1979년 베스비우스 화산 폭발 당시 묻힌 나폴리 부근의 폼페이와 그 밖의 곳에서 발견된 것들이다. 이들 벽화 그림에서 로마인들은 완벽한 단축법과 빛과 그림자에 의한 정교한 모델링으로 사물이 실물 과 같은 입체감을 띠고 있고 미약하게나마 원근법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각에서와 같이 회화에서도 그리이스의 것들보다 훨씬 깊이감이 있는 공간을 표현했다. 로마의 미술은 헬레니즘 시대 이후 그리이스 미술의 전통을 잇고 그들의 미술을 수용, 모방, 수집하여 나름대로 필요한 부분을 차용하였으며 무수한 복제품을 만들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로마 미술은 그들의 정복지역의 종교와 관습등과 어울려 국제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며 신과 영웅들의 아름다운 형태를 시각화하는 방법을 후대에 가르쳐 주었고, 이것은 서양 미술의 모태가 되었다. 9. 중세초기 미술 로마에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예술가들에 의한 초기의 회화들이 있다. 이들 그림은 초기 그리스도교 들이 사자를 매장한 지하묘소, 즉 카타콤(지하묘소)의 벽과 전장에 그려진 것들이다.성 피에트로에 마첼리노의 카타콤 천장화(4C초, 로마)을 보게 되면 로마의 이교도 그림 양식을 답습한 것이 분명하다.다만 인물상들의 자세가 경직되어 있고 약간 평평한 면에 그려져 있다는 것이 다른 점일 뿐이다. 이 카타콤에서는 현세에서의 행복보다는 구세주와 내세의 생활에 집중되어 있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사를 알아볼 수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 화가들이 갑작스럽게 이와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 은 아니고, 상징, 다시 말해서 그 어떤 다른 존재세계에 속하는 것,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나타내는 형태 또는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그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림을 각 장면으로 구획하며 또 결합시키는 그림의 틀은 그 자체가 복잡한 상징적 구조이며 각 틀의 장면도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1. 카타콤 4세기(311)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기에 이르렀고 이는 미술에 있어서도 혁신적인 계기를 만들어 이곳저곳에 거대한 성당이 세워지고 이에 따라 광대한 벽면에 그릴 그림의 필요성이 대두되게 된다. 이에 비해 카타콤은 상대적으로 너무 소박한 그림이었고, 이는 고도로 훈련된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계기를 창출하게 되었다. 바로 이들이 초기 그리스도교의 벽면 모자이크를 만들어낸 장본인 들이었다. 이것이 주는 효과는 여지껏 카타콤이 주는 초라함을 한층 웅장함으로 변모시키는 것이었다 2. 채색사본 이러한 설화적인 모자이크를 생각한 사람들은 성서에서 그 소재를 찾아왔다. 이러한 성서를 사본화 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벽화나 모자이크, 패널화의 예술성에 필적하는 작품을 생성해내었다. 이것들의 초기 양식은 그리스,로마 회화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채색사본의 등장으로 한정된 화면 안에 많은 얘기들을 효율적으로 넣을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3. 비잔틴 미술 4세기로부터 5세기에 걸치는 동안 서로마보다는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의 미술이 상대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리하여 정치적인 몰락을 겪은 서로마보다는 동로마에서 6세기에 이르러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은 콘스탄티노플에서 그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는 데, 이를 비잔틴 미술이라고 부르고 있다. 비잔틴미술 5∼15세기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동방정교회 사회에 발전한 그리스도교 미술.단 4세기 이전에도 준비 시기가 있었으며(예를 들면, 시리아의 두라 에우로포스 유적), 고대로부터의 탈피는 점진적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종교 교의(敎義)·정치·군사 상의 이유로 6세기 이후 제국(帝國)의 중심으로부터 점차 분리하여 자립한 여러 지역이 있다. 콥트(이집트)·누비아·에티오피아·시리아·팔레스타인·아르메니아·게오르기아·불가리아·세르비아·러시아 등이 그곳으로, 그 지역의 미술은 비잔틴미술과의 연결은 다소 있으나, 각각의 독창성이 차차 인식되어 갔다. 이러한 것들은 비잔틴미술의 틀에서 나온 것으로, 오히려 동방정교회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야 한다. 비잔틴미술은 그 시대적·지리적 위치로, 고대 헬레니즘 미술의 뒤를 이어 그 전통에 고대 아시아의 전통과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영향 등을 더하고, 신흥 그리스도교를 정신적 기초로 새로운 에너지를 가지고 흥륭하였다. 또한 이슬람 미술과도 어느 정도 교류하면서, 약간의 시대적 변화와 어떤 종류의 일관성을 가지고 10세기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이처럼 비잔틴미술은 고대 이집트 미술과 함께 생명력이 있는 미술로 평가되고 있다. 보통 이것을 3기로 나누며, 전기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로부터 아이코노클래즘[聖畵像破壞]의 마지막까지(6∼9세기), 중기는 마케도니아 및 콤네노스 왕조(9∼12세기), 후기는 팔라이오로고스 왕조(13∼15세기)이다. 【건축】 비잔틴 건축가는 토목공사나 궁전건축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며, 콘스탄티노플의 빈 비르 딜레크[千一柱]라고 불리는 지하 대저수소(大貯水所) 등에서 그 편린이 엿보이나 건축의 주요한 것으로는 성당이다. 성당 건축은 한편으로는 종교의식이라고 하는 기능에 따른 계획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집이라고 하는 강한 상징적 성격을 가진다. 종교의식을 목적으로 하는 집회를 위해서는 사제(司祭)를 위한 제실(祭室) 및 내진(內陣)과, 신도(信徒)를 위한 신랑(身廊)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고대 말기의 공공건축의 종장식(縱長式:바실리카식) 설계가 채용되었다. 그러나 그 경우, 제실은 거의 언제나 반원상(半圓狀)으로 돌출하고, 반원 모양의 지붕을 덮었다. 이 반원 모양의 지붕은 신의 자리로서의 상징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의미로는 오히려 원 모양의 지붕이 상징성이 강하다. 원 모양의 지붕을 씌운 집중식 건축은 성스러운 천계(天界)로 덮인 종교적 공간을 구성하고, 그 원형은 고대 로마에도 있으나 5세기부터 세례당(洗禮堂), 묘당(廟堂), 순교자 기념당 등으로 우선 발달하였고(라벤나의 갈라 플라키디아 묘당 등), 그것이 점차 대형화하여 성당의 형태를 갖추었다. 그러나 전례(典禮)를 위해서는 제실과 주랑(主廊)을 직선으로 늘어놓고 다시 거기에 전실(前室:세례 지원자용)과 앞뜰(일반인용)을 추가한 종장식 설계가 편리하므로 집중식의 경우도 대부분 바실리카 구조를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6세기 수도의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성당건축의 상징성은 십자가를 본뜬 평면 설계에서도 보인다. 바실리카에서는 제실 앞쪽의 한 구획이 좌우로 뻗어 익랑(翼廊)을 형성하고, 라틴 십자가를 묘사한 것이 보이며(단지 이것은 유럽에서 특히 현저하다), 집중식에서는 사방에 같은 길이의 가지를 뻗게 하여 그리스 십자가를 본뜬 것이 통례이다. 바실리카식이 비잔틴 중기 이후 차차 쇠퇴한 데 비하여 집중식은 그리스 십자형의 설계를 고집하면서 여러 유형을 발달시켜 나갔다. 【장식미술】 장식은 특히 건축 내부에 집중되었다. 이 경우 장식이란 단순한 벽면 미화가 아니라, 조형적 수단에 의하여 공간 내부를 성화(聖化)하여 거기에 초자연적인 세계를 현실에 나타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성스러운 것 또는 성스러운 공간은 현세 또는 물질계의 것처럼 나타내면 안된다. 이 초자연적인 것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은 무엇보다도 빛이며, 빛의 구성 요소로서의 색채이다. 이리하여 십자가, 여러 종교 용구, 제단 등이 황금·보석 등으로 만들어졌으며, 비단 등을 사용한 호화로운 염직품이 귀하게 여겨졌고, 건축장식으로는 색유리를 많이 사용하는 모자이크 미술의 발달을 가져왔다. 그 전형적인 것으로는 이탈리아의 라벤나에 풍부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모자이크는 비용과 수고가 드는 것이므로 시대 또는 경우에 따라 벽화가 이를 대신하였다. 어쨌든 그 표현양식을 보면 무엇보다도 색채의 효과가 중시되어 3차원적인 표현에서 입체감이나 원근 표현은 되도록 피하려 하였다. 그렇지만 아직도 성스러운 자나 성스러운 장면의 물질화를 두려워한 사람들은 성상(聖像) 표현을 우상숭배라 하여 부정하고 아이코노클래즘 운동을 8∼9세기에 걸쳐 흥륭시켰다. 마케도니아 왕조 이래 성상 미술은 또다시 흥하지만 그것도 모자이크·벽화·아이콘으로부터 사본 등 따위 색채 미술의 각 분야에 걸쳐 있다. 그러나 유럽과는 달리 3차원적 성격의 강한 조각미술이 끝내 발달하지 못한 것은 유대교 이래의 전통인 우상에 대한 강한 경계심 때문일 것이다. 조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기둥머리, 내진 장벽 등) 주제의 대부분은 추상적·상징적이며, 사람의 상을 표현하는 경우에도 거의 평면예술에 가깝다. 4. 모자이크 최초 황금시대의 모자이크는 콘스탄티노플보다는 오히려 비잔틴 제국의 이탈리아 변방이었던 라벤나에 많이 남아 있었다. 그 중 가장 기념비적인 것을 성 비탈레 성당의 제단 양쪽 벽면에 있는 한 쌍의 모자이크이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시종들(547년경, 이탈리아의 라벤나, 성비탈레 성당) 에서 융성한 비잔틴 제국의 배경에 이루어진 화려한 유림 모자이크의 현란함을 맛볼 수 있다. 신하와 성직자 및 시녀들을 거느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그의 비 테오도라가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광경을 그린 그림은 새로운 인간미의 이상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726년에 이르러서 황제의 성상금지령이 발단이 되어 약 1세기동안 비잔틴 회화와 모자이크의 발달은 중단되었다. 제 2황금시대(850-1200)에 이르러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모자이크에 나타난 정신화된 인간미의 이상과 휼륭하게 조화된 고전주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그리스도의 책형(11C, 다프니 수도원)은 1기 황금시대의 모자이크에서 강조된 영원성과 신성에 고전미술의 인간성과 육체적 우아함이 덧붙여진 것으로 유명하다. 이 고전주의의 심오한 일면은 인간적 감정의 고귀함에 있으며 기원전 5세기의 그리이스 미술에서 처음 으로 나타난 억제되고 고귀한 인간적 고통의 표현이다. 이콘icon 즉 패널에 그려진 성화상은 제2황금 시대에 수많이 제작되고 숭배되어 왔다. 그러나 그 기원은 성상파괴 논쟁 이전으로 소급된다. 성모자에서 보이는 미의 이념은 이전의 고전시대와는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가지고 있는데, 밀랍화 수법과 명암에 의한 모델링은 로마 초상화와의 관련을 보여주고 있다. 얼굴모습의 묘사에서 천상적인 미의 이상과 조소적인 표현이 두드러 진다. 또한 기하학적 화면구성에서 연유하는 강한 인상 또한 그러하다. 이러한 이콘은 에술의 창의성보다는 장인적 기능에 더 의존하는 것이었다. 옥좌의 서모자와 같은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후면의 광휘에서 우리는 당시의 작품이 강조했던 바를 알 수 있다. 10. 로마네스크 미술 10세기 중반 카롤링거 왕조의 분열이후 세력을 잡은 오토1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으며 자신의 세력을 위해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황제 승인을 받으려 노력하였다. 972년에는 오토2세가 비잔틴의 테오파노 공주와 결혼하면서 게르마니아 지방에 그리스 문화가 전파되기도 했다. 또한 이시기에는 노르만 족, 헝가리 족, 사라센 족들의 침입이 종식되어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교회가 발전하고 예술활동이 활발하였다.11세기에는 카놋사의 굴욕등, 교황의 권위가 하늘을 찌르는 시기였으며 성상파괴 문제로 인해 1054년 로마와 콘스탄티노플로 교회가 분열되기도 했다. 11세기 후반에 유럽전역에서 일어난 로마네스크 미술은 “교회의 승리”대표라 할 수 있다. 유럽 전역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으며 정치,경제,사회의 일반이 교회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1. 조각 로마제국의 붕괴와 함께 소멸되었던 석조조각의 부활은 11세기에 이르러 일반서민 사이의 신앙이 부활되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대체적으로 이 시기의 조각은 로마말기의 조각에서 볼 수 있는 고전적 형태가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전체의 구성, 인물의 정면성, 건축적 틀속에 끼워 넣은 배치법 들은 비잔틴 작품의 원천이 되었다. 프랑스 로마네스크 조각의 절정인 므와사키 수도원의 남쪽 정문 조각은 아일랜드 괴수 교차 문양의 계보에 속하기도 한다. 2. 회화 조각가에 비해 로마네스크 화가들의 그림에선 전시대로부터 그렇게 혁신적인 발전을 보이지는 않는다.뛰어난 세밀화또한 틀의 짜임새가 인물의 형태와 엮어져 놀라운 통일성을 낳고 있다. 이 시기의 회화에선 선적인 성격과 표면의 색조 구성사이의 일관성 있는 조화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관성 있는 의장을 태어나게 했으며 표현력에서도 상당한 진보를 보인다. 11. 고딕미술 서양의 중세는 원시적인 방식과 세련되고 복잡한 방식이 기묘하게 혼합된 로마네스크 양식을 거쳐 수도원 중심의 문화권에서 도시의 성장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이에 따라 성당 중심의 문화가 도래한다. 성당은 많은 수의 신자를 수용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건축주인 사람을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갖게 했다.기독교가 전래된 이래 신의 완벽한 반영을 목적으로 하는 당시 중세의 미술에 있어서 이러한 양식의 변화는 중세인을 하나로 묶어 놓을 수 있었던 것이 종교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줄 뿐 아니라 고딕 양식에 있어서 모든 미술의 목적이 단지 종교의 목적으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학문이나 사상을 받아들이게 됐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는 당시의 기술이나 지식 또한 발전하고 있음 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다. 고딕 양식은 특히 성당건축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평가를 받게 되며 이와 함께 조각, 회화, 공예까지 확대 발전하게 된다. 4세기의 비잔틴 미술에서 중세가 끝나는 시점으로 보는 14세기 까지를 중세로 볼 때 고딕 양식은 중세의 모든 미술 양식의 가장 완벽한 구현이라 하겠다. 1. 건축 기독교의 발전은 예배를 위한 기능과 함께 미학적으로도 아름다운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표현하는 상징물로서의 건축을 창안해 내려는 욕구로 교회의 건축 양식은 계속 발전하게 된다. 안정적인 동유럽에서 보다 다변하고 있던 서유럽에서는 12세기의 로마네스크 양식에 이어 새로운 건축 양식을 만들어 내는데 12세기 후반 북부 프랑스인들에 의한 성당 건축의 주심 원리를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이 새로운 양식의 주된 특징은 실용과 실리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취하게 하는 원리라고 하는 수직양식의 원리, 건축 기술상의 획기적인 발명인 교차 궁륭이라 할 수 있다. 교차적 궁륭이란 11세기 초 목조로 덮였던 바실리카식 설계로 된 네이브의 천장을 석조 궁륭으로 바꾼 이후 고딕 석조 건축에서는 둥근 천장의 무게가 벽을 붕괴시킬 위험이 있었기에 이의 해결책으로 늑재 를 엇갈리게 가로 질러 놓는 방식이다. 건축가들은 또 궁류형 천장의 아치들을 지탱하는 데 아치만으로도 충분함을 알게 되어 기둥들 사이의 무거운 석벽을 없애고 그 사이사이에 유리창을 끼워 넣기 시작한다. 여기에 외부의 압력을 경감시키기 위해 뾰족아치를 사용하므로 여러 곳에 둥근 천장이 가능해졌다.성당의 하중은 벽에서 부벽으로 옮겨진다. 이것으로 성당의 정점의 높이의 조절이 자유로와졌으며 고딕 의 특징은 첨탑과 공중부벽은 더욱 발달하게 되었다. 고딕 건축은 첨형아치와 공중부벽으로 쓸모없게 된 외벽을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로 치장한다. 이로서 돌과 유리로 완성된 성당의 황홀한 구조는 이 전의 로마네스크에서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준다. 인간을 압도하고 천상의 세계에 온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하고 기독교의 또다른 초월의 세계의 신비감을 하늘의 영광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고딕 양식은 로마네스크보다 더 엄격한 구성으로 건축적 완벽성을 지향했고 종교적 신념과 사상을 건축에 옮겨 중세 교회 건축양식을 대성했다. 이 양식은 르네상스 이후 쇠퇴하다가 19세기 고딕 부활 운동이 일어나면서 대학 공중 건물, 상용건물 등의 건축에 이용된다. 2. 조각 이 시기에 나타난 조각 양식은 성당의 양식과 같이 발달하는 데 이는 이전의 로마네스크 양식과 많은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전형직인 고딕 조각의 발전은 랭스와 방베르 성당 조각들과 함께 13세기 초에 들어서 결실을 맺는다. 작품들 대부분은 고전적인 균형과 자연적인 것에 대한 충실함으로 특징되는 데 로마네스크에서 보여 주었던 육중하고 엄격한 조각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영웅적이고 기념비 적인 것으로부터 보다 친밀하고 복잡한 것으로, 과장된 감정 표현이 강조되었다. 연속되는 주름의 흐름과 아름다운 형상으로 발전한 고딕 조각 양식은 15세기 국제적 고딕 양식과 연결된다. 프랑스 로마네스크의 조각보다 더 추상적인 초기 고딕 조각이 남아 있는 샤르트르 대성당의 조상들의 특징은 원주 자체의 견고한 원통형을 이용 환조 조각의 첫걸음을 내딛었으며 조용하고 엄숙한 느낌을 준다.이 조상들의 옷 주름은 금방 흐를 듯 유연하며 그 안에 생생한 육체가 숨어 있음을 암시한다.이는 당시의 조각가들이 고대의 전통을 의식하고 있었으며 이해하고자 했다는 것을 알려준다.랭스 성당의 조상은 고전주의가 자취를 감추고 간결, 수직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우미의 양식이 나타나 후기 고딕 양식의 기준이 된다. 최소한 이 시기의 조각가들은 성서의 이야기를 더욱 감동적으로 실감나게 자기들이 느낀 방식으로 나타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인간의 감정을 전 시대 보다 더욱 사실적으로 나타내려고 노력한 점은 이 시기 이후 나타나는 르네상스의 기본원형이 되기에 이른다. 독일 프랑스인으로부터 조각의 전통을 전수받은 독일의 조각가들은 프랑스인들과는 달리 성당 내부에서 조각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고 종합적이고 계획적인 조각으로부터 자유로왔으며 훨씬 개성적인 표현을 구현하였다. 나움부르크 성당의 조상은 사실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에 나타낸 필사본은 인물들의 감정을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성서의 이야기를 전하되 베끼거나 있는 그대로를 묘사하려고 한 것이 아닌 더욱 감동적이고 생명감을 불어 넣으려 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이탈리아 13세기에 이르러 고딕 조각이 이탈리아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데 이는 이탈리아의 상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택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알프스 이북보다 훨씬 고대의 전통아래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의 조각은 덜 고딕적이었는데 고딕적이라고 불릴만한 작가는 니콜라 피사노였다.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우아한 옷주름의 흐름과 성실한 모델링에서 프랑스의 영향과 고대의 전통이 살아 있음을 볼 수 있다. 국제 양식 1375년과 1425년 사이에 서유럽에 전역에 퍼진 양식을 말하는데, 주된 특징은 유연한 곡선 형식으로 인위적이고 목가적인 분위기에 세속적인 상류사회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게 표현된 것들이다. 이것은 13세기 중반 화려한 프랑스 궁정양식에서 기원을 찾아 볼 수 있는데, 15세기 초까지 번성하였다. 국제양식 조각의 알프스 북부 최대 거장으로 클라우스 슬뤼터의 작품과 알프스 남부의 기베르티의 작품이 있다. 4. 회화 프랑스 고딕 양식에서 회화의 범위는 비교적 제한되어 있었다. 회화로 채워져 있어야 할 성당의 벽면이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 시대의 채색 사본은 화려하고 도상적인 주제를 표현한 색유리와 자리를 바꾸고 대성당의 건축과 함께 스테인드 글라스도 함께 황금시대를 맞는다. 프랑스의 회화의 중요 위치로 자리잡게 된 이 것은 1250년 이후 대성당 건축이 시들해지면서 사양길 에접어들고 다시 채색 사본이 유행하게 된다. 이탈리아 벽화, 즉 이탈리아에서는 프레스코의 전통이 남아 있었다. 이는 알프스 북부에서 회화가 스테인드 글라스로 대치될 무렵, 이들은 그리스의 전통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교회당에 유리벽을 사용하지 않았다. 프레스코화, 벽면 모자이크, 패널화는 알프스 이남에서 활발하게 발전하였다. 13세기의 비잔틴의 전통이 남아 있었고, 이는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위대한 작가 지옷토의 출현을 부른다. 그는 프레스코화로 유명한데, 환조라 할 만큼 공간의 깊이감, 원근법, 옷의 유연한 흐름 등은 평면 위에 가장 실감 나게 바로 눈 앞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그렸다. 비잔틴 회화를 이어 좀 더 부드럽고 온화하게 그린 화가 둣치오는 템페라로 그리스도의 일대기를 한 장면으로 그렸다. 이 그림에서 원근법이 사용되었으며 시정 넘치는 친밀감과 사실적이고 깊이감 있게 공간을 나타내고 있다. 그 밖에 마르티니, 로렌쳇티 형제의 그림이 있다. 국제양식 국제 고딕 양식의 첫단계는 지옷토와 둣치오의 이탈리아 자연주의에 프랑스 시모네 마르티니의 우아함 을 혼합시키고 후기 로마 회화의 고대 양식을 가미시킨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플랑드르 예술의 기초를 마련해 준다. 브뢰데들람의 는 이탈리아 양식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보여 준다. 패널화를 그린 랭부르 형제는 달력의 세밀화가 나타난 최초의 그림이기도 하다.국제양식회화의 제 1인자인 젠틸레 디 파브리아노는 부드러운 음영과 옷주름의 유연함, 주의깊은 동,식물의 관찰은 빛이 형상이나 색채로부터 독립하고 있으며 빛의 중요성을 서서히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12.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14세기 중반 “인간과 자연의 재발견”이라는 말로 표현될 만한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배경을 보면 첫 번째, 이탈리아에선 귀족계급과 부유한 부르조아 계급 사이의 구분이 없어졌으며,두 번째, 이탈리아가 서유럽의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고대 로마시대의 유적이 산재하는 등 고전시대에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세 번째, 도시의 자부심과 사유재산제가 잘 발달되어 예술에 대한 후원의 기회가 많았다는 것등이다....
출처 : Daum 지식
글쓴이 : 무식은죄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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