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스크랩] Re: 서양 미술사에 대해서

네잎 2014. 2. 2. 22:25
  • 서양 미술사에 대해서
  • 마니에리즘 전성기 르네상스 이후의 경향들을 이르는데 흔히 평가절하되어 온 경향이기도 하다. 즉 인위적이고 기교적인 성격이 강하고 형식적인 면이 많이 부각되어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전대의 거장들의 기법을 모방했다고 간주되어 창조성에서 의심을 받았다. 그러나 금세기에 들어 그 기교적인 면에서 오는 차가움과 건조함이 개인의 주관적 성향의 극대화 결과 전성기 르네상스와 다른 경향을 의도하고 자연과 고대형식의 주관적 이상화를 지닌 내적 통찰력 이 재평가 받고 있다.전반적인 그림들에서 느껴지는 불안감, 신비감, 몽상적인 분위기, 기괴한 배경, 과정된 인체비례에서 시대정신의 한 면의 표출로 보기도 한다. 특히 파르미지아노(1503-1540), 틴토렛토(1518-1594), 코렛지오(1489-1534), 엘 그렛코등이 대표적인 매너리즘 작가로 꼽히고 있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후기작을 이 경향의 일부에 포함시키는 견해가 있으나 매너리즘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이상을 거부하는 것이다. 다른 고나점에서 자연미(이상미)가 아닌 세련미와 예술적 기교, 신비한 관념들을 추구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양식적 특징으로는 콘트랍포스터의 극단적인 바른 포즈와 인체의 장신화, 차갑고 선명한 색조, 표면처리의 매끈함, 단축법과 원근법의 과장, 비논리적인 공간배치이다. 파르미지아노의 와 엘 그레코의 의 인물묘사에서 나타나는 과장된 인체 비례, 틴토레토의 은 그 이전의 과 비교하면 단번에 확인되는데 강한 불빛의 명암대비, 동세가 격한 인물들의 움직임고 불안정한 사선구도등이 마이에리즘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엘 그레코와 코렛지오는 종교화를 그렸다. 특히 엘 그레코는 톤이 밝고 대담한 붓질과 신비스러운 종교화를 이루고, 반면 코렛지오는 스퓨마토 기법을 적극 활용하여 인체를 부드럽고 섬세하게 표현하여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또 그는 신화를 다른 내용에서도 환성적인 스퓨마토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로코코 미술 로코코는 바로크 시대의 호방한 취향을 이어 받아 경박함 속에 표현되는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 건축의 유행을 말한다.또한 로코코는 왕실예술이 아니라 귀족과 부르조아의 예술이다. 다시 말하자면, 유희와 쾌락의 추구에 몰두해 있던 18세기 프랑스 사회의 귀족계급이 추구한, 사치스럽고 우아한 성격 및 유희적이고 변덕스러운 매력을 그러나 동시에 부드럽고, 내면적인 성격을 가진 사교계 예술을 말하는 것이다. 로코코에 이르러 비로소 르네상스의 예술적 목표는 최종적으로 달성되며, 또한 로코코와 더불어 사물의 객관적 묘사는 근대 자연주의가 추구하던 정확성과 자연스러움을 확보한다. 로코코는 사실 돈 많고 권태로와진 향락가들을 위한 하나의 애로틱한 예술이다.이 시기에는 여성미의 이상 자체가 달라져서 보다 자극적이고, 보다 정교한 것으로 되었다. 또한 로코코는 서구 최후의 보편적 양식이다. 반면 같은 시기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선 파리의 로코코 양식과는 대조적인 후기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이 지어졌다. 와토 ( Antoine Watteau 1684 ~ 1721) 18세기 초 화가들의 우상 숭배 인물은 빛, 색채, 움직임, 환희 등 아카데미가 싫어했던 모든 것을 갖춘 루벤스였다. 흐르는 듯한 필법과 화려한 색채대비등을 루벤스에게서 물려받은 와토의 그림은 반아카데미적이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아카데미는 상당히 개방적이어서 비평가들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와토의 그림은 인정을 받게 되었다. 페트 갈랑트, 즉 우아한 축제라느 새로운 범주가 와토에 의해 창안되었는 데, 이것은 공원풍의 배경에서 희극 배우와 재미있게 노는 젊은 귀족들을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은 아름다움의 환성속에 어딘지 슬픈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 데, 그것은 말로 설명하거나 규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와토의 예술을 단순한 기교와 예쁘장한 아름다움의 영역을 초월하게 만든다. 아마도 이는 그가 아름다움의 덧없음을 의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샤르댕 (Jean-Baptiste Siemon Chardin 1699 ~ 1779) 18세기 귀족풍의 몽상적 세계가 퇴조하고 보통사람들의 에피소드를 그리기 시작한 샤르댕은 이 분야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로 손꼽힌다. 평범한 아름다움에 대한 민감한 감수성과 공간 질서에 대한 명쾌한 감각을 보여주는 샤르댕은 풍속화가인 동시에 정물화가였다. 에서 보듯이 그가 그린 대상은 꾸밈없는 일상적인 것이었으며 그는 존경에 가까운 마음으로 이를 떠받들고 있다. 그는 눈에 띄는 효과나 날카로운 비유를 추구하지 않고 가정적인 정경의 시정을 느껴 화폭에 담았으며 신중하게 구사된 색조의 미묘한 농담의 변화과 꾸밈없어 보이는 화면 구성을 하였다. 호가드 (William Hogath 1697 ~ 1764) 윌리엄 호가드는 뛰어난 초상화가였으나 그의 주된 관심은 생활의 장면에 있었다. 그는 청교도적 전통에서 성장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 예술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선의 보상과 악의 대가에 대한 교훈적 내용을 그릴 것을 계획하였다. 은 '방탕아 편력'이라는 그림 시리즈의 3장면이다. 그림을 통해 설교를 하고자 한 것은 호가드의 시대에 이미 대중미술속에 존재하였으나 호가드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붓을 사용하고 빛과 색을 배합하는 것, 인물의 배치 등에 대단한 솜씨를 발휘하였다. 게인즈 보로(Thomas Gainsborough 1727 ~ 1788) 영국이 낳은 위대한 초상화가 게인즈보로는 이탈리아 거장의 작품을 연구하기 보다는 타고난 스스로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가 그린 는 영국적인 분위기를 띄고 있으며, 는 싸늘한 우아함을 보여주고 있다. 게인즈보로는 건강이 좋지 못하여 그의 그림에선 와토와 같은 어두운 색조의 섬세함이 드러나고 있다. 또한 그는 인기는 없었으나 풍경화를 그리는 것도 좋아하였다. 레이놀드 경 (Sir Joshua Reynolds 1723 ~ 1792) 18세기 영국 상류사회를 만족시킨 화가, 레이놀드 경은 게인즈보로와는 다르게 이탈리아 거장을 연구하고 모방하라는 카라치의 교훈을 받아들였으며, 게인즈보로를 인정하기는 하였으나 그의 제자들에게 그를 따르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두 사람 모두 반다이크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거창하고 감동적인 것만이 '위대한 예술'이라 믿었던 레이놀드 경은 지식인이었으며 상류사회의 생활을 했다. 또한 상류사회가 필요로 하는 미술은 초상화라는 사실을 인정하였으며 그는 초상화를 단순한 초상화 이상의 것으로 만들려 하였다. 을 보면 아이의 성격과 그 성격의 우아함과 매력을 전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셰 (Francois Boucher) 그는 대단한 화가라기 보다는 예술적 관습의 대표자로서 '징세청 부인'과 '신흥부자들' 및 자유주의적 궁정인사들에게 가장 환영받는 에로틱한 장르 그림의 대가이다. 그는 와토의 "페트 갈랑트"다음으로 로코코 회화의 가장 중요한 주제인 연애신화의 창조자이다. 또한 에로틱한 주제를 공예 미술로 확장하여 국민적인 양식을 만들었다. 앙투완 (Jean-Antoine Houdon 1741 ~ 1828)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초상미술가 이자 조각가인 앙투완은 베르니니가 시작한 전통을 이어 받았다. 위대한 이성의 옹호자 에선 날카로운 기지와 통찰력있는 지성을 엿볼 수 있다. 프라고나르 (Jean-Honore Fragonard 1732 ~ 1806) 게인즈보로와 같이, 프랑스에서 자연의 아름다운 측면에 대한 취향을 표현한 작가 프라고나르는 와토의 전통을 따르는 화가였다. 을 보면 놀라운 효과를 구사하는 그의 솜씨를 볼 수 있다. 바로크 미술 1600년부터 1750년 까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카톨릭 국가에서 발전한 미술양식을 뜻한다. 18세기의 비평가들은 마니에리즘과 마찬가지로 바로크를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하였다. 마니에리즘과 로코코 사이의 17세기 문화 전반의 양식을 지칭하며 이는 처음으로 이탈리아가 중심이 되어 시작되었다. 바로크는 프랑스의 고딕 양식이 국제적 성격으로 발전하였던 것처럼 범 유럽적 문화 현상이었으며 국가나 각 지방 특유의 문화권에 따라 서로 상이하게 나타난다. 즉 하나의 공통분모를 같기엔 너무 방대하고 다양한 예술경향이었던 것이다. 궁정적, 카톨릭 적 바로크와 시민적, 프로테스탄트적 생활권의 바로크는 상이하게 나타난다. 이는 베르니니와 루벤스의 예술과 렘브란트와 반 고옌의 예술에 있어 내적 외적으로 다르게 묘사된다. 전자가 감각주의적이고 기념비적, 장식적인 반면 후자는 이보다 더 엄격하고 더 형식을 존중하는 " 고전주의적 " 양식으로 나뉜다. 바로크의 개념은 처음부터 고전주의적 흐름을 타고 있었고 이와 함께 카톨릭 국가들에서 자연주의적 조류가 있었다. 카라바조에 의해 대표되고 이는 후에 바로크 예술의 전반적인 예술 흐름이 된다. 즉, 바로크는 첫째, 자연주의적 추세를 부활시킨 카라바조는 예술의 원천으로 관념보다 자연의 관찰을 강조했다. 둘째, 전성기 르네상스 고전기와 로마 고대 풍습으로의 복귀가 있었고, 셋째, 필수적이며 가장 지속적인 요소로 베네치아, 특히 티치아노의 전통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고딕 이후로 예술양식은 점점 더 다양하고 세분화 되어 갔다. 이런 각양각색의 정신적 내용들은 자연주의적인지, 반자연주의적인지,종합적인지, 분석적인지,고전주의적인지, 반고전주의적인지를 판단할 수 있었지만 바로크를 기점으로 이런 분류방식은 의미를 잃게 된다. 즉 예술에 있어서 통일적 성격을 엄격하게 규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술은 자연주의적이며 고전적일 수 있었고 분석적이며 통일적일 수 있게 되었다. 미술가들이 대행했던 사물을 관찰하는 방법은 갈릴레오나 뉴우턴 같은 과학자들이 대신하게 되었고 영국, 프랑스, 스페인 같은 나라는 해외에 식민지를 앞다투어 건설하였다. 상대적으로 독일과 이탈리아는 이에 뒤졌다. 반종교 개혁운동으로 카톨릭의 권위를 되찾은 교회는 다시 안정을 누리며 새로운 형태의 양식을 추구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교회 수가 증가하고 절대주의의 승리는 궁전의 건축을 재촉하였다. 고전고대와 르네상스의 걸작들을 공부하기 위해 로마로 모여든 수많은 미술가, 건축가 등은 유럽 북부와 남부의 문화를 창출하고 교류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카라바조 Caravaggio. Michelangelo Merisi da (1573 ~ 1610) 전시대의 예술을 이끌었던 전통을 거부한 가장 뛰어난 사람 중의 하나였던 카라바조는 1573년 이탈리아의 카라바조에서 출생했다. 11세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그는 성인이 된 후 그가 태어난 지명이 이름으로 불리워진다. 그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묘사하겠다는 그의 의도는 인간과 그의 종교적 체험에서 나온 것이며 이것은 이를 카라바조의 "자연주의"라 부른다. 그의 자연주의적 회화관은 당시 반종교개혁 운동에 부수되어 가톨릭의 새로운 신앙과 맞물렸다. ...더보기
출처 : Daum 지식
글쓴이 : Sindy_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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