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시 2018-2019

새로운 시와 지루한 시 / 이승하

네잎 2014. 2. 13. 23:37


 

새로운 시와 지루한 시

이승하

‘모방은 죽음이다’란 말이 있다. 시란 시시해서는 안 된다. 내용에서건 형식에서건 조금이라도 새로운 구석이 있어야 한다. 구태의연한 시는 상상력을 빈곤을 말해줄 따름이다. 하지만 새로움이 시의 진정성을 무시한, 이를테면 실험을 위한 실험이라면 그것은 언어 유희요, 새로움을 가장하여 말장난을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젊은 시인 중에는 재기 발랄함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이가 꽤 된다. 물론 재기 발랄함만을 갖고 있다 해도 큰 재산이긴 하지만.

부지불식간에 몸이 나뒹굴려져

아리고 아린 갖가지 삶의 고리를 엮듯

몸을 질질 끌어 공간을 지우는

섬뜩한 경계 없음의 퍼포먼스.

선명한 경계를 세우며 휘두른

후리채에 맞고 나가떨어진

파리, 모기, 하루살이, 거미, 때로는

길을 잘못 든 귀뚜리의 육신을 보며,

그 박살난 몸뚱이를 보며, 또한 나는

경계를 허물지 못했던 매 순간을 탓하며

진정, 아리게 바닥에 나뒹구는 몸.

죽음을 당기고 있는 생의 순간들이

저릿저릿하게 바닥을 긋는 선,

지울 수 없는 궤적이 파인다.

대단원의 피날레에 사선이 그어진다.

―김광기, 「스키드 마크」 전문

김광기 시인의 등단 지면을 나는 모른다. 동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나왔다고 하나 학부는 어디를 나왔는지 모른다. 나는 이 시인의 시를 이번에 처음 보았는데 흥미로운 요소가 있어 논해보고자 한다. 스키드 마크(skid mark)는 자동차가 급브레이크를 밟았을 때 옆으로 미끄러지면서 차도에 남겨지는 자국이다. 제일 앞 4행을 읽고 나는 고속도로 상에서의 사고를 연상했다. 차는 완전히 구겨진 종이 조각처럼 되고, 사람의 몸은 도로상에 나뒹굴거나 차체에 질질 끌려가지도 한다. 마치 후리채(파리채?)를 맞고 나가떨어진 파리나 길을 잘못 들어 몸이 박살난 귀뚜리처럼 말이다. ‘경계’란 무엇일까? 삶과 죽음의 경계, 살아 숨쉬는 육신과 박살난 몸뚱이와의 경계, 육과 영의 관계……. 뭐 이런 상대적인 것 사이의 경계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 둘 사이의 경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엇갈리기도 한다. 그 시간에 졸지 않았더라면, 그 시간에 승선하지 않았더라면,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더라면……. 살 사람이 죽고 죽을 사람이 산다. 그런데 스키드 마크는 그 시간의 일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증언할 수 있다. 인간이 자력으로, 혹은 자의로 그 경계를 허물지는 못한다. 그 경계는 운명의 힘이 관장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경계를 관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차!’ 하는 순간에는 이미 “아리게 바닥에 나뒹굴”게 된다. 시인이 이해한 스키드 마크는 “죽음을 당기고 있는 생의 순간들이/ 저릿저릿하게 바닥을 긋는 선”인데, 아뿔싸! 사고가 나버린다. 지울 수 없는 궤적이 파인다. 이 시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이다. 생의 순간들이 죽음을 당기고 있다는 표현도 절묘하지만, “저릿저릿하게 바닥을 긋는 선”이라는 시행에 이르러서는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대단원의 피날레에 사선이 그어진다”는 것은 끔찍한 교통사고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것이 바로 스키드 마크라는 뜻이리라. 이 시의 소재는 당연히 스키드 마크이고, 주인공도 ‘나’라기보다는 스키드 마크인 듯하다. 전반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쓴 시인가 막연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특이한 소재를 다루는 솜씨를 높이 사주고 싶다.

다음에 감상해볼 시는 ‘새로움’과는 거리가 먼 것일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고전적인 시인데, ‘말의 비틀기’ 대신에 ‘뜻의 진솔함’을 취한 것을 크게 인정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배냇소 이랴 어디어디

다래나무 코뚜레 끼고

콧구멍 벌름벌름

가난이 가난에게 이랴 어디어디

새벽달 논배미에

청오이 덩굴손에

막내둥이 잠꼬대에

철 지나는 구름에게

사랑이 사랑에게 이랴 어디어디

꽁보리밥 숟가락에

개똥 먹은 들꽃에게

걱굴가재 더듬이에

운명이 행복에게 이랴 어디어디

―김창제, 「農牛 길들이기」 전문

김창제 시인의 약력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건국철강 대표’라는 것이다. 시집 제목이 ‘고물장수’, ‘고철에게 묻다’, ‘녹, 그 붉은 전설’인 것으로 보아 그 동네에서 잔뼈가 굵은 분임을 알 수 있겠다. 아무튼 내게는 생소한 이름이다.

‘농우’란 농사일에 부리는 소이다. 제1연은 그야말로 ‘농우 길들이기’다. 기계화 영농이 아니라 소가 밭을 가는 농사이니 소규모가 아니면 전근대적인 영농이다. 그래서 “가난이 가난에게 이랴 어디어디” 하면서 가난을 길들이며 살아갔던 우리 위 세대 농투성이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 제2연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가난하기는 했지만 땅을 사랑하고, 농사일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며 살아간 우리네 조상의 사랑법을 또한 이해할 수 있다. 제3연에 가서는 다소 전환점을 마련한다. 가난은 곧 운명이었으나 가난하다고 해서 불행했던 것은 아니다. 그 시절 그 어른들은 “꽁보리밥 숟가락에/ 개똥 먹은 들꽃에게/ 걱굴가재 더듬이”에도 행복을 느낄 줄 알았다. 이런 경지를 안빈낙도라고 할까, 안분지족이라고 할까. (‘걱굴가재’가 무엇인지는 시인에게 물어보아야겠다.) 이 시의 또 하나의 장점은 소를 길들이거나 몰 때 사용하는 의성어 “이랴 어디어디”가 무척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어디어디’는 아무 뜻이 없는 말이겠지만 영어로 쳐 where, somewhere, well now, how, why 등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가난은 어떤 기준으로 말할 수 있는가. 사랑이란 어디서 찾을 수 있으며 행복은 또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가난’이여, 어디 두고보자, 운명에 굴복한다는 것이 어디 될 법한 일인가. 가난한 이 내 몸을 어디 받아줘야 말이지.

『시와 반시』 2005년 여름호가 배출한 2명 시인의 시는 대체로 길다. 김산옥의 「영산홍」이 총 1연 11행, 이세경의 「봄길」이 총 6연 9행, 「冬眠」이 총 7연 10행으로 되어 있어 비교적 짧을 뿐, 20행이 넘는 시가 대부분이다. 시가 길다는 것이 흠이 될 수는 없다. 그런데 시가 시종일관 뻣뻣한 산문 문장으로 되어 있다면, 즉 운율이 전혀 배어 있지 않은데 길기까지 하다면 문제가 있다. 두 분은 이제 갓 등단한 신인이니까 앞으로 좋은 시, 혹은 시다운 시를 쓰면 된다. 등단작 중 2편을 예로 들어 지적을 좀 하고 싶은데, 너무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가 횡단보도를 건넌다 다리를 벌리고 어기적어기적

그가 걷는 것만 봐도 어디가 아픈지 어디서 진물이 나는지

병원에 가서 어디를 수술받고 왔는지 대번 안다

그는 최대한 빨리 걷지만 제일 느리다

그는 부산하게 움직이지만 제일 굼뜨다

그가 보도블록을 걷는다 다리를 최대한 벌리고 느릿느릿

붙었다 떨어지는 보도블록 기울어져 벌건 국물을 토해낸다

몸이 자꾸 기울어진다 이쪽저쪽으로 무게가 표나게 옮겨다닌다

그는 뛰지 않는다 아무데나 앉지 않는다

그가 다리를 벌린 채 걸음을 멈춘다

함부로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두리슈퍼 평상 위에 방석을 놓는다

엉덩이를 뒤로 빼고 엉거주춤 한참 생각한다

천천히 자세를 바꾸고 손으로 평상을 짚는다

그가 조심스레 방석에 앉는다 은행잎 한 장

그보다 먼저 장기판에 앉는다

그는 상처를 모시고 다닌다 거기에 집중한다

―김산옥, 「대장」 전문

국군간호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대위로 전역한 김산옥이기에 이 시는 시인의 상관 중 한 사람인 그 어떤 대장을 형상화해본 시인 듯하다. 대장의 행동거지를 꽤나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그럼으로써 독자는 대장의 성격까지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 시는 참으로 지루하다. 제2행 “다리를 벌리고 어기적어기적”에서부터 제3행 “대번 안다”까지가 제법 긴 문장일 뿐 비교적 짧은 문장이 계속 이어지는데, 그 숫자가 무려 19개이다. 19개의 무미건조한 문장이 나열되어 있으니 얼마나 지루한가. 특별한 사건도 없고 감칠맛 나는 묘사도 없다. 직설적인 직유도 은근한 은유도 없다. 일언이폐지왈, 시가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소월과 영랑, 미당과 백석의 시를 보라. 우리말도 잘 살아 있지만 이들의 시에는 은밀히 숨어 있는 운율이 은은한 향기를 풍긴다. 그래서 시인 것이다. 「대장」은 산문의 나열이지 시라고 봐주기 어렵다.

그는 숲에 앉아 있다

시커먼 불판에 가리워진

참나무 숯불이 숨어서 지는 밤

투명하고 맑은

소주잔을 부딪치면서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사람들

그늘 속에서, 말이 없다

뭉턱뭉턱 덤으로 잘려 나온

선명한 붉은 간, 기름장에 찍으며

맥없이 웃어도 보지만

독을 숨긴 간사한 방울뱀의 혀를

가져보지 못했거나

하늘로 오르는 동아줄 스쳐본 적도 없이

길고 지루한 회식 상 맨 끄트머리에서

또 말이 없다

세상이 내민 손 잡을 줄

모르는 게 아니었으나

이 숲을 벗어나

동네 어귀에 다다를 쯤이면

아이들에게 줄 몇 마리의 붕어빵,

그 온기가 소록이 손에 닿을 때마다

외등으로 서성이는 푸른 별빛이

늘 고개 숙인 가슴에 스몄던 것이다

―이세경, 「황소고집, 숯불구이」 부분

연 구분 없이 총 34행으로 되어 있는 시인데, 제1~23행을 적어보았다. 이 시의 등장인물들은 “길고 지루한 회식 상”에서 숯불구이를 먹고 있다. 주인공 격인 ‘그’는 아이들에게 몇 마리의 붕어빵을 사줄 정도로 착실한(?) 가장이다. 시의 내용으로 보아 가장이 다소 소심한 것 같다. 독자는 전형적인 소시민이 회식 자리에서 말없이 숯불구이를 먹고 있는 장면을 연상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시의 문장이다. 제8행 “뭉턱뭉턱 덤으로 잘려 나온”부터 시작되어 제15행에서 한 문장이 끝난다. 무려 여덟 개의 행이 한 문장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 문장도 마찬가지로 길다. 제16행부터 23행까지 역시 여덟 개의 행이 한 문장을 이루고 있다. 이것이 어째서 시인가. 행을 나누어 두어 시처럼 보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시가 아닌 것이다. 라 퐁텐의 우화시에도 리듬이 숨어 있고 투르게네프나 정진규의 산문시를 봐도 외양이 얼추 산문 같지만 그 속에는 리듬이 담겨 있다. 시의 문장은 맺고 끊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길고 긴 문장이 중첩되는 이런 시는 내용을 음미하기 이전에 형식이 맛을 완전히 죽여버린다. 두 명 시인이 이런 시답지 않은 시를 쓴 데 대해 비난을 할 수도 없다. 중견, 원로 시인들도 이런 식으로 문장이 축축 늘어지는 시를 쓰고 있기 때문에 신인인 이들은 ‘배운 대로’ 쓴 것일 따름이다. 하지만 심사평에서 이런 점에 대해 지적을 좀 했더라면 어땠을까.

오늘날 독자들이 시집을 사 읽지 않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있는 것이다. 시가 도무지 시 같지 않은데 무엇을 느끼겠다고 시집을 사본단 말인가. 출간하는 족족 베스트셀러가 되는 류시화용혜원원태연이정하이해인의 시집을 보면 내용은 제쳐두고라도 이딜은 감칠맛 나게 우리말을 구사할 줄 안다. 운율을 적절히 살리고 여백의 미를 적당히 활용하기에 적어도 외양으로는 시에 가깝다. 정통문학권에서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는 정호승안도현김용택나희덕 네 시인의 시집을 봐도 마찬가지이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눈으로 보아도 음미가 가능하고 입으로 낭송하면 더욱 시의 맛과 멋을 느낄 수 있기에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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