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붉은 달/유병록-
붉게 익어가는
토마토는 대지가 꺼내놓은 수천 개의 심장
그러니까 오래전 붉은 달이 뜬 적 있었던 거다 아무도 수확하지 않는 들판에 도착한, 이를테면 붉은 달이라 불리는 자가
제단에 올려놓은 촛불처럼, 자신이 유일한 제물인 것처럼, 어둠 속에서 빛났던 거다 비명을 삼키며 들판을 지켰으나
아무도 매장되지 않은 들판이란 없다
붉은 달은 저 높은 곳에서 떨어졌던 것, 사방으로 솟구친 붉은빛이 들판을 물들인 것
이것은 토마토밭 사이로 구전되는 동화
피 뿌린 대지에 관한 전설
그를 기리기 위해 운집한 군중처럼
올해의 대지에도 토마토는 붉게 타오른다 들판 빼곡히 자라난 붉은 빛이 울타리 너머로 흘러넘친다
토마토를 베어 물 때마다
내 심장으로 수혈되는 붉은빛
붉은 달이 뜬다
<2>-두부/유병록-
누군가의 살을 만지는 느낌
따뜻한 살갗 안쪽에서 심장이 두근거리고 피가 흐르는 것 같다 곧 깊은 잠에서 깨어날 것 같다
순간의 촉감으로 사라진 시간을 복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두부는 식어간다
이미 여러 번 죽음을 경험한 것처럼 차분하게
차가워지는 가슴에 얹었던 손으로 이미 견고해진 몸을 붙잡고 흔들던 손으로
두부를 만진다
지금은 없는 시간의 마지막을, 전해지지 않는 온기를 만져보는 것이다
점점 사이가 멀어진다
피가 식어가고 숨소리가 고요해지는 느낌, 영혼의 머뭇거림에 손을 얹은 느낌
이것은 지독한 감각, 다시 위독의 시간
나는 만지고 있다
사라진 시간의 눈꺼풀을 쓸어내리고 있다
<3>-구겨지고 나서야/유병록-
바람에 떠밀려 굴러다니던 종이가 멈춰선다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세계의 비밀을 누설하리라 다짐하던 때를 떠올렸을까 검은 뼈가 자라듯 글자가 새겨지던 순간이 어른거렸을까 뼈를 부러
뜨리던 완력이 기억났을까
구겨지고 나서야 처음으로 허공을 소유한 지금은 안에서 차오르는 어둠을 응시하고 있을까
안쪽에 이런 문장이 구거져 있을지 모른다
빛의 속도를 따라잡으면 시간을 거스를 수 있지만 어둠은 시간의 죽음, 그 부피를 측량하면 시간을 지울 수 있을 것……
문장을 완성한 후에 의미를 깨달은 것처럼
종이는 상처를 끌어안은 채 잔뜩 웅크리고 있다 내 눈동자에서 어떤 적의를 발견한 듯이
구겨진 몸을 다시 펼치지 말라는 듯이 품 안에서 겨우 잠든 어둠을 깨우지 말아달라는 듯이
<<유병록 시인 약력>>
*1982년 충북 옥천 출생.
*고려대 국문과 졸업.
*2010년〈동아일보〉신춘문예 당선.
*시집『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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