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서 부르는 실존과 서정의 노래
-윤인자 시집 『스토리가 있는 섬, 신안島』를 중심으로
강 경 호
(시인, 문학평론가)
1.
윤인자 시인의 시세계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섬’이라는 특정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섬과, 섬사람, 그리고 시인 자신의 이야기들이다. 물론 섬이라는 장소성 또한 인간의 삶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보편적인 공간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 시집의 제목이 암시하듯 섬의 역사성과 서사는 육지에서의 삶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제주도 시인 문충성 시인의 일련의 시 속에서 제주도라는 섬은 육지에서 고립되었다거나 소외되었다는 의식을 보여주는데, 그의 의식 속에서는 끊임없이 육지를 고립이나 소외가 아닌 자유로운 공간으로 인식하는 태도를 보여주며, 섬을 ‘갇힌 공간’ ‘소외공간’으로 인식한다. 이러한 인식은 윤인자의 시에서도 엿보인다. 가령 “태풍주의보가 내리면 오도가도 못하고 이틀이고 사흘이고 섬에 갇혀 고립무원이다”(「스토리가 있는 섬, 신안島·7」) “뭍에서 멀고 바람이 하도나 심해/사람들의 발길이 뜸”(「스토리가 있는 섬, 신안島·4」)해진다는 시인의 진술이 그것을 말해준다.
물론 오늘날 시인이 살고있는 압해도는 연륙교가 만들어져 육지와 연결이 되었지만 아직도 신안군의 많은 섬들은 그대로 섬으로 남아있다. 이렇듯 육지와 떨어져 있는 “섬”, 또는 “바다”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하여 쓴 윤인자 시인의 시는 특정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들이 투사되어 있다.
제4부로 구성된 이번 시집은 제1부에 9편의 시를 선보이고 있는데, 우이도·안좌도·태도·만재도·흑산도·압해도 등의 자연경관과 섬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풍경, 신안군이 배출한 추상화의 대가 김환기의 생가, 풍부한 천일염과 다양한 어족자원을 소개를 하고 있다. 제3부는 이러한 이야기를 보다 구체적으로 심화시키고 있으며, 제2부는 배꽃·호박·곶감·민달팽이·나팔꽃·은행나무·매실·아카시아·목련 등 자연을 차분하고 섬세하게 바라보는 시인의 정서를 보여준다. 제4부에는 시인의 일상에서 만나는 개인적 정서를 시로 표현한 작품들로 시인의 가계의 서사를 잔잔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시적 세계는 제1시집인 『에덴의 동쪽』의 연장선상에 놓인 것들로 보다 언어미학적으로 형상화되었다.
2.
윤인자 시인은 오래 전에 필자에게 시를 배운 적이 있어 친근한 누님 같은 분이다. 그 동안 조용히 습작만 하는 줄 알았는데 시인으로 등단하여 시집을 출간하기까지 하였으니 그 집념이 놀랍다. 시쓰기에 부지런하여 또다시 제2시집을 펴내었으니 참으로 성실하고 부지런하다. 이 시집들은 신안군의원으로 바쁜 윤시인의 처지에서 보면 대단한 창작력을 보여주고 있어 그저 놀랄 뿐이다.
이 시집은 신안군의원으로서 신안군 구석구석을 훤히 살피는 윤인자 시인의 시선이 엿보여, 그가 얼마나 신안군을 사랑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앞에서 밝혔듯이 이 시집의 1부와 3부는 천사(1004)의 섬 신안의 여러 섬에 새겨져 있는 서사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투사되어 있다. 특히 『스토리가 있는 섬, 신안島』에서 9편의 연작시를 통해 우이도·안좌도·태도·만재도·흑산도·압해도 등의 섬의 지리와 풍경, 그리고 그곳에 얽혀있는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제3부에서는 섬사람들의 삶을 형상화시키고 있어 신안사람들의 실존을 담아내고 있다.
먼저 제1부의 이야기들을 살펴본다.
바다가 깊고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는 섬,
홍도와 장도, 다물도, 대둔도, 영산도, 대도, 군도(상태, 중태, 하태) 가거도, 만재도 등 11개의 유인도와 89개의 무인도가 있고 어류학서인 자산어보를 남긴 정약전의 유배지이며 홍어가 유명한 섬 바다가 생업인 사람들에겐 바다 속을 알다가도 모를 뱃길이 가장 두렵다는데 바다가 뒤집어지는 일이란다 섬사람들에게 무서운 건 바람이다 겨울에 부는 북서풍 여름에 부는 남동풍 지나가는 태풍은 섬을 유린하고 사람들을 유린하고 관광객들 속을 까맣게 태운다 사방이 바다인 섬 주의보가 내리면 오도 가도 못하고 이틀이고 사흘이고 섬에 갇혀 고립무원이다 언제 그랬냐는 듯 바람이 바다를 베고 잠이 들면 홍어잡이 배들은 닻줄을 올리고 바다로 나간다 섬사람들의 마삭줄처럼 질긴 삶이 이어지고 흑산도 사람에게 바다는 꿈이며 생활터전이다. 떠날 수 없는 고향의 환부 없는 상처가 쓰리고 아픈 섬이다.
-「스토리가 있는 섬, 신안島·7」 전문
‘흑산도’의 지리환경과 삶을 산문으로 형상화한 이 작품은 아프게 살아온 섬사람들의 상처를 드러낸다. 시적 대상이 ‘흑산도’라는 공간으로 설정되었지만, 이는 흑산도 뿐만 아니라 여러섬사람들의 실존의 환경을 보여준다.
도입부에 흑산도가 11개의 유인도와 89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음과, 정약전의 유배지가 흑산도임을 밝히고 있다. 특히 흑산도는 조선시대 유배지로 유명한 곳이어서 정약전이 천주교 박해인 신유사옥에 관련되어 유배를 온 유형의 땅이다. 더불어 “섬사람들에게 무서운 건 바람”이어서 겨울에는 “북서풍”, 여름에는 “남동풍”이 가장 두려운 존재라고 일러준다. 특히 사방이 바다여서 “태풍주의보가 내리면 오도가도 못하고 이틀이고 사흘이고 섬에 갇혀 고립무원”임을 주지시킨다. 큰바람으로 인해 배가 뒤집혀서 마을 사람들이 바다에서 수장되는 것을 비일비재하게 보아온 시인은 바람부는 바다가 무섭고 그러한 곳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섬사람들의 운명이라고 인식한다. 이렇듯 죽음과 생의 양면성을 가진 바다이지만 “바람이 바다를 베고 잠이 들면 홍어잡이 배들은 닻줄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 “마삭줄처럼 질긴 삶”을 이어가는 흑산도 사람들의 실존을 노래한다.
한편 신안의 안좌도는 세계적인 추상화가인 김환기가 태어난 고향으로 그의 생가가 있다.
안좌도, 박지도, 반월도를 이어주는
천사의 다리 밑엔
칠게, 꽃게들이 놀고
마늘, 양파 밭고랑에 쏟아지는
늦은 봄의 햇볕은 바다를 닮아 푸른 빛이다.
청자빛 물너울을 건너 안좌 읍동 사거리에 들어서면
추상화의 대가 김환기의 생가가 보이는데
돌계단을 오르면
화가의 유년을 복원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정지 문 앞에 걸린 초상화 속에서
오랜 세월 대처를 떠돌던
우리나라 비구상의 대가 김환기가
안식을 위해 고향집에 돌아와
방명록과 바람에 뒤척이는
지필묵을 내민다
평화롭고 다정한 화가의 얼굴에
저물어가는 노을이 한 잔 걸친 듯
비틀거리며 배경이 되어주는데
고향집에 돌아온 화가는 노을과 앉아 주거니 받거니
맨드라미 꽃 같은 저녁에 취하고 있다.
-「스토리가 있는 섬, 신안島·2」 전문
신안의 섬들은 육지와 이어주는 연륙교를 비롯하여 섬과 섬을 이어주는 연도교가 건설되고 있거나 건설되었다. 안좌도와 박지도, 그리고 반월도를 잇는 다리가 완공되어 교통하고 있다. 이 다리들이 건설됨으로써 태고 이래 오랫동안 유배의 공간, 소외의 공간, 단절의 공간이 열리는 시대를 맞고 있어 섬사람들이 그리워했던 육지로의 소통이 가능해지고 있다. 또한 그들의 의식속에 깃든 ‘유배의 땅’이 점차 유배로부터 깨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안좌도 뿐만 아니라 바다와 인접한 섬 주변 바닷가엔 “칠게, 꽃게들이 놀고” 있고 섬 안은 육지와 마찬가지로 “마늘, 양파 밭고랑”이 있어 이곳 섬사람들은 반농반어를 하고 있는 것도 보여준다.
특히 안좌도의 “읍동 사거리에 들어서면/추상화의 대가 김환기의 생가”가 있다. ‘조선 매화’, ‘백자 항아리’ ‘사슴’ ‘학’ 등 가장 한국적인 것을 그려내고, 김광섭 시인의 시를 모티브 삼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등을 그리며 인간의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물음과 존재의 심연을 모색한 김환기 화백의 생가가 있다. 그가 태어나고 이런 시절을 보낸 생가에 들어서면 “정지 문 앞에 걸린 초상화”가 마치 “오랜 세월 대처를 떠돌던” 김환기가 다시 고향집에 돌아와 아주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듯 걸려있다. 시인이 김환기의 생가를 방문한 때는 저녁 무렵이어서 마치 화가가 술을 한 잔 마셔 얼굴이 붉어지고 조금 취한 듯 한데, 그 모습이 “맨드라미 꽃 같은 저녁에 취”한 것처럼 시인의 눈에 비친다. 시인의 섬세하고 정감있는 서정이 가장 한국적인 화가 김환기의 모습이 새롭게 그렸다.
앞에서 살펴본 작품들은 신안군 섬들의 경관과 정취를 그리고 있는 반면에 다음의 「압해도」는 구체적인 오늘 섬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산업단지는 수면으로 갈아 앉고
풍력단지가 거론되는 복룡리
신안드림의 청색 꿈은 안개속이다
타지방은 전진 부농을 이뤄 가는데
압해도는 바다 위에 떠서 희망과 절망사이에서 우왕좌왕
덧없는 세월 잡초 같은 끈기 하나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압해대교가 개통 하던 날
가슴이 설레였는데
압해도는 바람 빠진 풍선이다
요행을 바란 것도 아닌데 추락의 허망함을 잊고
한 땀 한 땀 모를 심는 것처럼
희망을 심기위해 오늘도 바다로 들로 나간다
목청을 높여도 귀 기울인 사람 없고
힘없는 이곳 농민들 잘난 나라님들 향해
희망을 달라고 뻐꾸기처럼 목청을 높이지만
뉴스의 관심사는 온통 대변인의 성추행사건뿐이다.
-「스토리가 있는 섬, 신안島·8」 전문
압해도는 시인이 살고 있는 공간이다. 목포시와 연륙교를 통해 이어진 압해도는 한때 목포에서 살았던 노향림 시인이 목포 북항에서 압해도에 관련된 시를 써서 시인들에게 잘 알려진 시적 공간이다. 이곳은 신안군청이 자리잡고 있고 신안군의 중심이 되는 공간으로 시인은 이곳에서 배농사를 지으며 신안군의원으로 활동하는 생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한때 이곳에 “산업단지”가 조성될 것이라고 희망찬 꿈이 부풀기도 하였으나 이제는 그 계획이 무산되어 이곳의 군의원인 시인과 주민들이 실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바람이 많은 해양지역이여서 “풍력단지가 거론되는 복룡리”이긴 하지만 이것 역시 “신안드림의 청색 꿈은 안개속”인 실정이기도 하다. 다른 고장들은 “전진 부농을 이뤄 가는데” 시인이 살고 있는 압해도는 “바다 위에 떠서 희망과 절망사이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어 시인 뿐만 아니라 압해도 사람들은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그러나 섬사람들은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심기 위해 오늘도 바다로 들로 나”가는 것이다.
옛날부터 섬은 나라를 이끄는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여서 “힘없는 이곳 농민들 잘난 나라님들 향해/희망을 달라고 뻐꾸기처럼 목청을 높이”는 것이 압해도 사람들의 실존이다. 매우 절망적이고 자조적인 푸념이지만, 그만큼 섬의 발전을 위해 시인의 목소리는 안타까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3.
3부에서도 시인은 신안의 서사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꾸밈없이 노래하고 있다. 3부에서는 섬사람들의 실존을 보다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연 사흘 비가 내리더니 들녘이 온통 연둣빛이다.
잉꼬부부로 소문 난 서울 아짐이
나물 캐러 가다가 복장이 터져 죽겠다며
호미로 죄 없는 담벼락을 꺽꺽 찍어댄다
어제 읍내 모임에 나갔다가 새벽녘에 만취해 들어온
아저씨의 셔츠에 붉은 립스틱과 파운데이션 자국
오빠라며 주고받은 휴대폰 문자에
열이 뻗혀 살 수가 없다고
늘그막에 무슨 꼴이냐며 하소연 한다
한참을 그렇게 열변을 토하다가 정신이 드는 듯
냉이국 끓여 속 풀어줘야 한다며 허둥지둥 돌아가더니
해가 중천에 떠올라
새참 때가 다 되어서야 밭으로 나간다
봄기운이 완연한 햇살이 방긋 웃으며
서울 아짐 뒤를 따라 나선다.
-「서울 아짐」 전문
윤인자 시인의 시집 『스토리가 있는 섬, 신안島』에서 화자는 시인 자신이다. 주로 3인칭 시점으로 섬과 바다, 그리고 섬사람들의 이야기를 훤히 꿰뚫듯 바라보고 있다.
「서울 아짐」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각도 시인 자신의 이야기처럼 노래하고 있다. 이 작품의 절기는 봄날이다. 그래서 “연 사흘 비가 내리더니 들녘이 온통 연둣빛이다.” “잉꼬부부로 소문 난 서울 아짐이/나물 캐러 가다가 복장이 터져 죽겠다며/호미로 죄 없는 담벼락을 꺽꺽 찍어”대는 모습을 시인은 바라본다. 서울 아짐의 남편이 읍내에 나갔다가 돌아왔는데 남편의 “셔츠에 붉은 립스틱과 파운데이션 자국”이 묻어있는 것을 보고 서울 아짐이 궁시렁거리는 모습과 남편의 휴대폰에 ‘오빠’라고 서울 아짐의 남편을 지칭하면서 뭐라고 문자를 보낸 것에 “늘그막에 무슨 꼴이냐”고 화가 난 모습을 맛깔스럽게 형상화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서울 아짐은 “냉이국 끓여 속 풀어줘야 한다며 허둥지둥 돌아가더니” “새참 때가 다 되어서야 밭으로 나”가는데 “봄기운이 완연한 햇살이 방긋 웃으며/서울 아짐 뒤를 따라 나선다.”
읍내 모임에 나갔다가 잠시 색시집에라도 갔을 남편을 향해 불만을 터뜨리면서도 남편을 생각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서울 아짐, 즉 섬사람들의 훈훈한 정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흔히 시골마을에서 볼 수 있는 정겨운 모습을 통해 ‘서울 아짐’이라는 구체적인 인물의 일상을 그려낸 이 작품은 대단한 삶이 아니어도 인내하며, 또는 사랑을 담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개인적이고 사소한 섬사람들의 서사 뿐만 아니라 시인은 ‘활어공판장’이라는 생의 현장을 보여주기도 한다.
조금 사리 따라 고깃배가 선창에 닻을 내리고
조용하던 어판장이 팔팔 생기가 돈다
수산시장이 비린내로 꽉 메운 새벽을 열면
경매사와 중매인의 손가락 소통으로 거간이 끝나고
왁자지껄하던 새벽을 떨이한 수산시장에
얼음에 묻힌 생선들이 일렬 횡대로 누워 있다
바다의 지문 하나 기억할 수 없는
살아서는 갈 수 없는 그 길을
고기들은 비늘만 살아서 반짝인다
안강망 어선에 잡혀온 고기들의 부릅뜬 죽음이
염장으로 염을 마치고 운구에 올라
짧은 생들이 요령처럼 떠나간다
콩나물 해장국에 아침을 말던 어부들은
다시 푸른 바다의 노래를 부르며
닻을 올린다.
-「활어 공판장」 전문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아다 활어 공판장에 내놓는 “고깃배가 선창에 닻을 내리”면 “조용하던 어판장이 팔팔 생기가 돈다” 그러면 활력이 넘치는 “수산시장이 비린내로 꽉 메”워지고 “경매사와 중매인의 손가락 소통으로 거간”이 이루어진다. “왁자지껄하던 새벽을 떨이한 수산시장에/얼음에 묻힌 생선들이 일렬 횡대로 누워 있다” 섬사람들에게 새벽에 문을 여는 수산시장의 경매는 섬사람들이 살아있다는 표시이다. 바다를 배경으로 삶을 펼쳐가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경매가 끝나면 사람들은 제각기 매입한 생선들을 또다른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생선들에게 소금을 뿌리며 준비를 한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들을 시인은 “고기들의 부릅뜬 죽음이/염장으로 염을 마치고 운구에 올라/짧은 생들이 요령처럼 떠나간다”고 말한다. 눈을 뜬 채 죽은 물고기들의 죽음조차 인간의 죽음처럼 의인화시킨 시인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
“고깃배가 선창에 닻을 내”림으로써 분주해졌던 수산시장의 한바탕 소란이 끝나고 “콩나물 해장국에 아침을 말던 어부들은/다시 푸른 바다의 노래를 부르며/닻을 올”리는데, 일평생 수없이 반복된 이 지루한 의식은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다. 태풍이 불면 배를 띄우지 못하지만, 삶과 죽음의 현장인 바다로 나가는 어부들의 모습에서 생은 평범함의 연속임을 시인은 말하고 있다.
윤인자 시인의 시적 관심은 생명성에도 닿아있다.
혼절한 억새를 일으켜 세우는 바람은 고민이 깊다
산 밑까지 찾아 온 가을을 보낼 수도 없고
어질러진 산야는 난장이다
가뭄 폭염 폭우에 맞은 들녘,
부풀린 희망조차 없는데
쭉정이만 남은 들판을 배고픈 산짐승만
어슬렁어슬렁 배회하고 있다
사람만 배가 고픈 것이 아니다
사람과 공생하는 모든 식물과 곤충들도
허기진 가난한 가을 들녘
어디에도 안전한 곳이 없다
방패막이도 없다 소돔과 고모라의 땅처럼
징벌이 있을 뿐 원망해서는 안 되는 일
우리가 환경파괴범이라는 것을
신의 가호를 바라며
교만과 오만을 버려야 할 때이다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과일나무엔
봄이 겹치고 가을이 겹치고
상처 입은 자연은 아직도 방치 상태
상처가 깊다
처방도 없는 통증 때문에
가을이 쓰리고 아프다
-「가을이 아프다」 전문
문학평론가 도정일 교수가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이제 인간은 자연 앞에서 죄인이다.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자연조차 물질적 가치로 인식하여 더 많은 이익을 위해 자연을 희생시키고 있다. 화석연료를 과다하게 사용하고, 숲을 불도저로 밀어 그곳에 공장을 짓고 도시를 건설하였다. 이로 인해 많은 동식물이 멸종하고 있는데, 이러한 절체절명의 시대에도 인간의 탐욕은 그칠줄을 모른다. 뿐만아니라 공장에서는 중금속에 오염된 오폐수를 쏟아내고 4대강을 막아 흐르지 않는 물길엔 녹조가 끼어 인간의 생명조차 위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농산물에 농약을 쳐 먹거리조차 안심하고 먹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기 때문에 가을이 와도 가을이 아니다. 지난 여름 동안 이상난동과 가뭄으로 인해 들녘은 “부풀린 희망조차 없”다. 쭉정이만 남은 들판을 배고픈 산짐승이 “어슬렁어슬렁 배회하고 있다” 그러므로 추수의 계절 가을이 왔지만 “사람과 공생하는 모든 식물과 곤충들도/허기진 가난한 가을 들녘”인 것이다. 이제 “어디에도 안전한 곳이 없다” “소돔과 고모라의 땅처럼/징벌이 있을 뿐 원망해서는 안”된다고 시인은 자조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게 한 것은 “환경파괴”를 일삼은 인간의 탓이다. 그래서 시인은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며 모든 것을 인간중심으로 인식하고 행동해 온 ‘근대’를 비판하는 것이다.
가을 들녘을 바라보며 시인은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과일나무”를 바라본다. 이상난동으로 봄에 핀 과일나무의 꽃이 다시 가을에 피어 과일이 맺지 못해 “상처 입은 자연”을 “아직도 방치 상태”로 상처가 깊은 자연을 안타까워하고 인간의 탐욕을 꾸짖는다.
4.
앞에서 신안군의 섬에 얽힌 이야기와 경관,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서사를 보여주었다. 때로는 살기 힘든 농어촌의 모습과 인간의 탐욕도 내밀하게 들여다보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편들의 특징은 주로 메시지 전달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 무릇 서정시란 사물을 관조하며 느끼는 서정의 힘을 보여주는 일이다.
제2부와 4부에서는 윤인자 시인의 정신을 통과한 사물이 시인 특유의 시정 정서를 보여준다. 특히 제2부에서는 식물이나 동물 등 자연을 바라본 후 시인의 깊은 관조로 인해 사물이 새롭게 태어나는 모습을 읽게 한다.
네 땅 내 땅 다 차지하는 놀부다
아무데나 끼어드는 마을 마당발 반장이다
올망졸망 제 새끼 키우면서
대가족 수발드는 종갓집 며느리다
어린 것, 늙은 것, 이파리 쌈까지
건강 밥상 차려내는 우렁이 각시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 아래
펑퍼짐하게 퍼질러진
동네 아주머니의 궁둥이가
밭 가운데에서 오줌을 누고 있다.
-「호박」 전문
밭두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호박을 의인화시킨 것이 정겹게 느껴진다. 시인은 호박을 “네 땅 내 땅 다 차지하는 놀부” “아무데나 끼어드는 마을 마당발 반장”이라고 한다. 무성한 호박넝쿨로 땅을 많이 차지하고, 아무데나 덩굴손을 내미는 호박의 생태적 특성을 마치 마음씨 고약한 놀부처럼 인식한다. 그러면서도 “올망졸망 제 새끼 키우면서/대가족 수발드는 종갓집 며느리”라고도 한다. 결코 밉지 않은 눈으로 호박이라는 식물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을 느낄 수가 있다. 호박은 매우 유용한 작물이어서 다양한 약리작용을 하는 식물이다. “어린 것, 늙은 것, 이파리 쌈까지” 버리는 것 없이 먹을 수 있어서 “건강 밥상 차려내는 우렁이 각시”와 같은 것이다. 이렇듯 사람에게 아주 이로운 호박이 가을 햇살에 누렇게 익어가고 있는 풍경을 시인은 아주 여유롭게 바라본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 아래/펑퍼짐하게 퍼질러진/동네 아주머니의 궁둥이가/밭 가운데에서 오줌을 누고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여자의 “궁둥이”는 아이를 낳는 생명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식탁을 풍성하게 하는 호박을 다 의미화시킨 것이다.
다음의 「민달팽이」 역시 ‘민달팽이’를 의인화하고 있는데, 민달팽이이기 때문에 ‘집의 부재’를 전경화시킨 이 작품에서 민달팽이가 집없이 기어다니기 때문에 ‘유목민’으로 상징하고 있다. 민달팽이의 생태적 습성을 따라가며 시인의 눈은 ‘노숙자’의 운명과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비가 그친 후 민달팽이들
나들이를 나왔는지 대가족이 이동 중이다
손주놈부터 할아버지, 이웃사촌까지 대동하고
생계를 위해 유목을 하며
가다가 누워 잠든 곳이 집이다
평생 동안 쉴만한 방 한 칸 마련 못하고
옹골지게 자식들 다산을 이루어
그날그날 목숨 부재하며 대대로 이어온 노숙
닥치는 대로 먹고 길을 가다가 해 저물면
아무데나 배 깔고 잠드는 곳이 집이여서
무작정 살기 위해 이동을 한다
안전지대가 없는 허허 벌판
가야 한다. 언덕을 오르고 수렁을 지나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서 숨을 곳을 찾아서
서러운 눈물 닦아도 흔적으로 남아
습하고 그늘진 길을 간다.
-「민달팽이」 전문
“비가 그친 후 민달팽이들/나들이를 나왔는지 대가족이 이동 중”인 모습을 시인은 바라보고 있다. 쉽게 볼 수 있는 이 풍경을 시인은 “손주놈부터 할아버지, 이웃사촌까지 대동하고” 어디론가로 간다고 말하는데 이들이 “생계를 위해 유목”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달팽이’가 유목민이므로 당연히 “가다가 잠든 곳이 집이다” 그런데 시인은 “평생 동안 쉴만한 방 한 칸 마련 못하고/옹골지게 자식들 다산을 이루어/그날그날 목숨 부재하며 대대로 이어온 노숙”한다고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인간을 제외한 모든 것들의 삶이 ‘노숙’일진데 시인은 민달팽이의 생태에 대해 연민을 보내고 있다. 그런 민달팽이들의 모습이 누군가를 닮아있다. 길거리에서 노숙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닮은 것이다. 시인은 “민달팽이”에서 노숙자들의 삶을 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은 단순하게 ‘민달팽이’만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노숙자’를 노래하기도 한 것이다. “닥치는 대로 먹고 길을 가다가 해 저물면/아무데나 배 깔고 잠드는 곳이 집이여서/무작정 살기 위해 이동을 한다” 노숙자의 삶은 “안전지대가 없는 허허 벌판” 또는 “언덕을 오르고 수렁을 지나서/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서 숨을 곳을 찾아서/서러운 눈물 닦아도 흔적으로 남아” 따스한 집이 아니라 “습하고 그늘진 길을” 가는 운명인 것이다.
가슴이 훈훈한 윤인자 시인의 바라보는 것은 「민달팽이」에서 보았듯 버겁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것들을 때로는 안타깝게 때로는 등을 토닥여 주듯이 위로와 희망의 노래를 불러준다.
더듬더듬 한발씩 더듬는 밤
전봇대를 타고 아침에게 다가간다
마디마디 넝쿨 계단을 밟고서 살금살금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다해
조금 더 조금 더, 손의 힘을 내어
기댈 곳만 있으면 부여잡고 오른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아슬아슬
손발이 부르트도록 오르고 또 오른다
오르다 힘이 들어 내려다보면
아찔 현기증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아도 오금이 저린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
꿈과 희망을 향하여
잠든 모든 사물들의 어둠을 깨우는
아침 나팔을 불기 위하여
-「나팔꽃」 전문
아침에 피었다가 해가 뜨면 꽃을 오므리는 ‘나팔꽃’, 자신의 삶을 찾아 버겁게 어디론가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나팔을 시인은 뜨겁게 바라본다. 나팔꽃이 가는 길은 사람의 길처럼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여서 때로는 “전봇대를 타고” 희망이랄 수 있는 “아침에게로 다가간다” 다시말해 나팔꽃은 “밤”이라는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아침”이라는 희망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그래서 “마디마디 넝쿨 계단을 밟고서 살금살금/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다해/조금 더 조금 더, 손의 힘을 내어/기댈 곳만 있으면 부여잡고 오른다” 그러고보니 이 작품도 나팔꽃의 생만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의 삶을 그린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아슬아슬/손발이 부르트도록 오르고 또 오”르는 위태위태하고 당당한 모습에서 밝은 미래를 짐작할 수 있다. “오르다 힘이 들어 내려다보면/아찔 현기증을 느끼며/눈을 질끈 감아도 오금이 저린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꿈과 희망을 향하여” 제 길을 가는데, 그 길은 나팔꽃만을 위한 길이 아니다. “잠든 모든 사물들의 어둠을 깨우는/아침 나팔을 불기 위”해서인 것이다.
‘나팔꽃’이라는 사물에서 인간의 희망을 발견하는 예리한 눈으로 아름다운 서정을 노래할 줄 아는 시인의 상상력이 주목되는 작품이다.
5.
여태까지 들여다 본 작품들은 시인 자신의 실존들이라기 보다는 사물과 한발짝 거리를 유지하고 3인칭으로 바라본 것들이다. 그러나 다음 작품들은 시인 자신의 체험을 시로 형상화한 1인칭 서술의 형태를 띤다. 주지하다시피 3인칭은 시적 대상을 보다 깊게 바라보기 힘든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1인칭 시각으로 표현한 작품들은 보다 내밀하게 사물의 진실을 밝혀낼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의 과잉을 불러올 수도 있지만 윤인자 시인은 자기자신과의 사이를 적당히 유지하며 비교적 감정조절을 잘 하고 있다.
채전밭 가신 어머니 돌아오시지 않는데
어둠이 문지방을 넘는다
하루 종일 제 자리를 지킨 가로등도
수면 부족으로 자꾸 깜빡거리며 존다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가로질러
제트기는 어디론가로 길을 내고
대문 앞 백구는 컹컹대며 어둠을 쫓고 있다
어둠은 점점 안방까지 쳐들어오는데
뱃속에서는 쪼르륵 꼬르륵
하루 일 마치고 기분 좋게 취한 아버지는
푸푸 쉰 술 냄새를 방안에 풍긴다.
-「저녁 풍경」 전문
이 작품은 시인 자신의 체험일 수도 있지만 타자의 모습을 마치 자신의 체험인 양 그린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가 않다. 시인이 어떻게 ‘저녁 풍경’을 정서화시켰느냐가 중요하다. 시인의 생체험을 형상화시킨 작품이라면 이 작품의 배경은 시인의 유년시절일 것이다. “채전밭 가신 어머니 돌아오시지 않는데/어둠이 문지방을 넘는” 저녁무렵이면 누구나 어머니를 기다렸던 기억이 있다. 그것은 마치 어린 짐승이 어미를 기다리는 심정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녁무렵이면 “하루 종일 제 자리를 지킨 가로등도 /수면 부족으로 자꾸 깜빡거리며” 졸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가로질러/제트기는 어디론가로 길을 내고/대문 앞 백구는 컹컹대며 어둠을 쫓”기도 하였다. 저녁 무렵 어머니를 기다리는 시인이 모습을 잘 정서화시켜 이 작품을 읽는 사람이라면 어린 날의 추억이 소록소록 떠오를 것이다. 이처럼 좋은 시는 타자의 체험을 통해 자신의 기억을 정서화시키는 힘이 있다. “어둠은 점점 안방까지 쳐들어오는데/뱃속에서는 쪼르륵 꼬르륵” 시인은 배가 고파온다. 그런데 “하루 일 마치고 기분 좋게 취한 아버지는” 먼저 집에 들어오셨는지 “푸푸 쉰 술 냄새를 방안에 풍긴다.” 여전히 어머니는 집에 들어오시지 않아 어머니를 기다리는 어린 시인의 배고픈 눈동자가 아른거린다.
평생을 변함없이 부르시던 울 아부지 18번 레퍼토리는 아~아 으악새, 오 남매 키우시며 아무리 속이 상해도 아~아 으악새, 술 한 잔 거하게 드시고 기분이 좋아도 아~아 으악새, 간드러지게 잘도 부르셨다 으악새가 날아다니는 새인 줄만 알았다 으악대며 날아다니는 새가 갈대였다니 아버지 가셨지만 가을이 와 갈대꽃만 피면 울 아부지 노랫소리가 바람에 실려 온다 아~아 으악새. 이제는 내가 즐겨 부르는 노래, 차를 몰고 나들이 갈 때마다 아~아 으악새, 친구들과 몰려 노래방엘 가도 아~아 으악새, 나의 18번이 되었다.
-「저녁 풍경」 전문
시인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가 살아오신다. 아버지는 “아~아 으악새, 슬피우니” 하고 부르는 노래를 자주 부르셨다. 이 노래는 1937년 고복수가 부른 「짝사랑」이라는 노래로 옛사랑을 그리워하며 목메이는 매우 감상적인 가요이다. “오 남매 키우시며 아무리 속이 상해도 아~아 으악새” “술 한 잔 거하게 드시고 기분이 좋아도 아~아 으악새” 하고 부르셨다. 아버지에게 「짝사랑」이라는 노래는 그저 좋아하는 18번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방식의 표현방법이다. 그러므로 「짝사랑」은 기쁨과 슬픔 등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을 추스리고 견인하는 의식의 하나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어린 날 아버지가 부르는 노랫속의 “으악새”가 날아다니는 조류의 하나인 것으로 시인은 이해했다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였음을 훗날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겼지만 가을 바람에 갈대꽃이 피면 아버지의 노랫소리가 갈대숲에서 들려오는 것을 듣는 것이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부르는 「짝사랑」을 들을 수 없지만 시인이 “차를 몰고 나들이 갈 때마다 아~아 으악새”, “친구들과 몰려 노래방엘 가도 아~아 으악새” 하고 부르게 된다. 아버지의 18번이 시인 자신의 18번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노래는 아버지 모습을 떠오르게 하고 아버지의 삶을 들여다보는 창문이 된 셈이다.
이 작품은 노래라는 표현방식에 추억과 존재의 실존이 내재해 있음을 깨닫게 하고 자신의 삶을 이끄는 수단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앞에서는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형상화시킨 작품들이었다. 「건강검진」은 시인 자신에 관한 작품이다. 환갑을 넘긴 육체의 변화에 대해 단속을 하는 시인의 일상이 엿보인다.
직장에서 건강검진을 했는데
위염, 고지혈증, 골다공증, 갑상선, 자궁암
재검을 받으라는 전화가 왔다
위는 심한 위염에 용정이 하나
자궁암 초기 수술을 받았다
60여년 남짓 잘도 부려먹었다
잔병치레 한 번 없이 무탈한 세월이었는데
눈앞이 아찔하고 머리가 띵했다
몸에게 미안하고 죄송했다
병원에서 처방 해준 대로 약을 받고
처음으로 칼슘제와 영양제 비타민을 샀다
칼슘제는 아침에 두 알씩 하루 한번
비타민은 하루에 아침 저녁 두 알씩
그 외에 약들은 식전에 세 가지
취침 전 한 알 복잡하다
약 먹지 않고 지내던 날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첫날은 약사의 지시 따라 잘 챙겨 먹었다
그런데 다음날부터는
아침에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생각이 안나
건너뛴 것 같으면 저녁에 다시 챙겨먹고
어쩐 날은 포기하고 깜박깜박 기억마저 가물가물
건망증 하나 더 얻었다.
-「건강검진」 전문
시인은 “직장에서 건강검진을 했는데/위염, 고지혈증, 골다공증, 갑상선, 자궁암/재검을 받으라는 전화”를 받는다. 이른바 나이 들어 발병하는 성인병과 부인병에 혹시 큰 병에 걸리지 않았나 하고 시인은 몹시도 놀랐을 것이다. “위는 심한 위염에 용정이 하나”가 있고 “자궁암 초기 수술을 받았다” 그 동안 “잔병치레 한 번 없이 무탈한 세월이었는데/눈앞이 아찔하고 머리가 띵했다” 60년 남짓 잘도 부려먹은 “몸에게 미안하고 죄송했다” 병원에서 처방해준 대로 “약”과 “칼슘제” “영양제” “비타민”을 약국에서 샀다. 그 동안 몸이 무탈한 줄 알았는데, 이제 약꾸러미를 옆에 끼고 살아야 하니 그 동안 편하게 살아온 시간들이 행복한 날들이었음을 깨닫는다. “칼슘제는 아침에 두 알씩 하루 한번/비타민은 하루에 아침 저녁 두 알씩/그 외에 약들은 식전에 세 가지/취침 전 한 알”을 복용해야 하니 이런 약 저런 약을 시간에 맞춰 먹어야 하는 처지에 머리가 복잡해진다. 처음에는 시간에 맞춰 알맞은 양을 먹었지만 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생각이 잘 안 나는 것이다. 어떤 때는 약을 안 먹은 줄 알고 다시 먹고, 또 어떤 날은 먹은 줄 알고 안 먹는 경우가 허다해진다. “기억마저 가물가물/건망증 하나 더 얻었다.”
오늘날 풍요로운 먹거리와 현대의학의 발전으로 수명이 연장되었다. 아이를 잘 안 낳는 세태와 더불어 노인들이 많아졌다. 수명이 연장되어 병원에 노인들이 넘친다. 옛날 같으면 노인축에 낄 시인은 요즈음에는 노인이 아니다. 그러나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하는 연령이다. 시인은 기억력마저 감퇴하여 세월이 휘두르는 칼날에 무사하지 못한 몸과 기억력을 염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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