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자도엔 꽃 같은 사람만 가라․1
―튤립․1
사람보다 꽃이 더 많고
꽃보다 튤립이 더 많은
작은 네덜란드
튤립의 나라
꽃들의 천국이다
지상의 천국이다
천국처럼 환해서 실명할 수도 있음
난시도 관람 불가 근시도 관람 불가
단! 꽃과 같은 사람만 관람 허용
임자도엔 꽃 같은 사람만 가라
임자도엔 꽃 같은 사람만 가라․2
―튤립․2
향기가 없다는 것은
유혹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품위 있는 여왕처럼
살겠다는 뜻이다
향기가 진하면 벌 나비 꼬이듯
별 잡스런 놈도 꼬이는 법
능구렁이 담 넘듯 스리슬쩍
어째보려다 여왕을 능멸한 죄
죽어야겠지
그렇다고 향기 없는 꽃이라고
얕봤다가 곤장 백 대는 맞아야 할 걸
향기만 풀풀 날리는 꽃들 보라지
대가리가 빈 박 속인 걸
여왕은 뭘 생각한 줄 알아?
세상을 바꿀 꿈을 꾸고 있어
아마 그렇게 되겠지
여왕이니까
임자도엔 꽃 같은 사람만 가라․3
―튤립․3
얼마나 당찬 발상인가
탱탱하게 발기된 꽃대를 쏘아 올려
관능의 뜨거운 욕망을 쏟아내고 있다
아랫배 깊숙이 자란 본능의 슬픔까지
죄다 쏟아내고 있다
지혈을 안 하면 다 죽는다고
구급차만 눈 빠지게 기다리는데
오, 이럴 수가
다 쏟아내고 나자빠진 저 피 꽃들
대기리 모래벌판도
사람들 마음도
혼을 다 빼버린 피 꽃들 환하다
임자도엔 꽃 같은 사람만 가라․4
―전장포
저녁을 끌고 입항하는 새우잡이 배
관을 내리듯 달아 내리는 새우의
짜디짠 슬픔이 운구 되고
솔개 산 동굴에 정성스레 안치된
새우의 슬픔은 염분을 마시고
푸른 오만을 삭히며 안식에 든다
보리들이 익어가고
황천길이 열리는 날
부활의 아침을 맞는 새우들
육탈을 끝내고 육젓으로 오젓으로
식탁 앞에 앉아 희망을 사는 일이다
세상과 함께 하하 호호 섞이는 일이다
임자도엔 꽃 같은 사람만 가라․5
―마늘밭
마늘밭에서 자잘한 웃음소리가 난다
어이 순이네 궁둥이 남산만 허제?
크기로 따지자면 나가 더 클 텐디
아니여 아니다고
그럼 한 번 뵈어줘 봐 자 자 보드라고이
속옷을 홀랑 까발리자
햇볕이 하얀 궁둥이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찰칵찰칵 셔터를 눌러댄다
시상에 우째 이런 일이
마늘밭이 온통 붉다
임자도엔 꽃 같은 사람만 가라․6
―빈집
마당에 서있는 복숭아꽃은 봄이 되면
국기를 게양하듯 조등을 내걸었다가
봄이 지나가면 조등을 내린다
조등이 꺼진 빈집의 고요는 뱀처럼 똬리를 틀고
새끼는 또 새끼를 치고 있다
발라먹은 생선처럼 뼈만 앙상한 문짝과
환관의 무덤처럼 등이 굽은 집
마구 버려진 질그릇과 짐승의 배설물이 썩어가는 집
대문도 없는 빈집을 드나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쩌다 선악과를 따먹은 이브처럼 유혹에 빠져
복숭아를 따 먹으려 들어갔다가 뱀에 물려 죽고 나서
금단의 열매가 된 고개도 돌리지 않는 집
빈집에 혼자 남은 복숭아꽃만 제 몸을 키우며
주인의 기일을 위해 집을 지키고 있다
임자도엔 꽃 같은 사람만 가라․7
―바람의 본적지
바람의 본적지는 바다이다
바람이 본적지를 떠나는 일은 썰물 때뿐
시차는 다르지만 썰물 때면
마을에 있는 느티나무 꼭대기가
까치들의 거주지고 바람의 임시거주지다
가끔씩 까치들과 바람의 세력다툼이 격렬하면
마을은 꼭꼭 문을 닫고 두문불출
오늘은 출타중이라는 명패가 걸려 있다
소란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웬걸
혼자 있는 법을 도무지 모르는 바람은
악동처럼 장난기가 발동한다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면서
빨랫줄에 빨래들을 팽개치고
채전 밭 장다리꽃도 팽개치고
마을도 팽개치고 순식간에 엉망진창
다급해진 대기리 이장 알려드리겄습니다
바람을 잡어야 한께 연장들을 가지고
싸게싸게 나오시기 바랍니다
임자도엔 꽃 같은 사람만 가라․8
―백일장대회
가끔 대기리 바다는 간질병환자처럼 뒤집어져 발작을 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뭍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와 꽃밭에서
흥건한 낮잠을 자고 가는 바람이 오늘은 무엇 땜시 동했는지
횟배 앓은 어린애처럼 허옇게 뒤집어지고 있다
모래밭에 소나무, 풀잎, 꽃들이 일제히 등을 돌리고 앞으로 휘어지고 있다
마주보고 섰다가는 가슴팍에 비수를 들이대는 횡포를 누가 막겠는가
꽃구경 온 사람들은 서둘러 섬을 빠져 나가고 담당근무자들과
백일장을 주최한 문인협회 사람들만 시간을 때우고 있다
그래도 글짓기를 하겠다고 원고지를 붙들고 글을 쓰는
한 아이 엄마를 보고 바람에 대해 쓸까? 고민하는 사이
원고지를 낚아채고 날아가는 바람
아이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간다
엄마도 동하고 사람들도 동하고
대기리 바다도
동해서 죄다 뒤집어지고 마는 징헌 바람
임자도엔 꽃 같은 사람만 가라․9
―갯벌
갯벌은
날마다 산란 중이고
입덧을 하느라 끄윽끄윽
갯벌은 비린내 천지다
물이 빠지고 나면 갯벌은 하체를 다 드러내고
쑤-욱 잘도 낳는다
작은 게들이 옆구리 터진 김밥처럼 쏟아지면
긴 부리 황새는 배를 채우느라 정신이 없고
갯벌 깊숙이 은둔 중인 세발낙지는
촉각을 세우고 물때를 기다린다
고단함을 풀고 있는 낙지 잡는 배도 물때를 기다리고
신이 난 짱뚱어만 갈지자로 종횡무진
뜻을 알 수 없는 낙서처럼
갯벌이 온통 난장판이다
임자도엔 꽃 같은 사람만 가라․10
―봄날
뒷집에 혼자 사는 아저씨는 경운기를 몰고 출타를 하고
옆집에 사는 할머니는 유모차를 의지하고 마실을 간다
고요가 복병처럼 숨어든다
왠지 그 무엇이 기습을 해올 것 같은 불온한 생각이 든다
아니나 다를까
바다에 본적을 둔 바람들이 뒷집 느티나무 꼭대기를 장악하고
까치들 보고 집을 비우라는 웬 가당찮은 소리
죽기 아니면 살기 업어 치고 메치고
애먼 느티나무 찰과상에 골절까지
절규에 찬 비명소리 천지에 낭자하다
마실 간 이웃집 할머니 돌아오고
발칵 뒤집힌 빨래들을 쳐들고 훠이 훠이
까치들도 후르륵 바람도 후르륵
한동안 고요는 찾아오지 않을 것 같다
임자도엔 꽃 같은 사람만 가라․11
―제비
꽈리를 씹는 소리처럼 밖이 시끄럽다
또 찾아온 제비들이 전깃줄에 앉아
언성을 높이고 있다 가만히 듣자니
새 집을 지을 건지 아니면 헌 집을 쓸 건지
의견일치를 못보고 꽈리 씹는 소리로 지껄이다
현관문을 뱅뱅 돌고 있다
작년에 현관문에다 집을 두 채나 지어놓고
임대료도 없는 몰상식 앞에
한 채를 헐어버렸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냐고
떠들어대는 항변이 용산 재개발 생각이 난다
아마 한 채를 더 짓고 싶은데 눈치가 보이는지
흙점 하나 찍어 놓고 눈치를 보고
또 흙점 하나 찍어놓고 눈치를 보고 있다
마음을 비우고 여행을 떠났다
나뭇가지에 순한 잎들이 생쥐처럼 쫑긋쫑긋 돋아나고
청보리와 유채꽃이 수채화 같은 들녘에 앉아
봄볕을 무릎에 눕히고 어머니의 흰머리를 뽑아주듯
흰머리를 뽑아주자 봄볕도 꾸벅꾸벅 나도 꾸벅꾸벅
임자도엔 꽃 같은 사람만 가라․12
ㅡ팔월의 아침
삐거덕삐거덕
팔월의 아침은 대기리 들판을 질러오고
아침보다 먼저 일어나
수다를 떠는 제비들 소리에
풀잎의 푸른 정맥들 또르르 또르르
노숙한 지렁이 육두문자로 일어나고
저수지에 붕어들도 비늘을 말리느라
온통 저수지는 쏭 쏭 쏭
깨어난 마을도 입맛을 잃은 듯
숭숭 찬물에 밥을 말며
8월의 마차는 짐 부리듯 아침을 내려놓고
눈인사도 없이 덜커덕덜커덕 가고
염려가 되는 제비들 마차를 따라가며
괜찮아요? 괜찮아요?
임자도엔 꽃 같은 사람만 가라․13
―어머니를 찾아 간다
봉분을 차지한 풀씨들이 햇볕을 갉아먹고
먹다 버린 뼈들이 육화되고 있다
버려진 뼈들을 주어
두개골 쇄골 늑골 장골 순으로 어머니의 형상을 조립해본다
그러나 어머니를 받쳐줄 뼈들이 하나도 없다
날마다 호미질을 했을 날마다 갯지렁이를 팠을 관절뼈들이
삭은 새끼줄보다 못하다
후후 불면 날아가 버리는 먼지였다
부품이 없다 돈 주고 살 수 없는 부품
지구가 멸망해도 미완성으로 남아야 할 부품
기억 속에서 한 장의 사진으로 각인될 뿐
조립하다 만 어머니의 뼈들이 또 육화되고 있다
임자도엔 꽃 같은 사람만 가라․14
―개구리가 가갸 거겨
서책을 배우는 아이들처럼
밤 내 개구리들이 책 읽는 소리
가갸 거겨 나냐 너녀
임자도 방언을 배우는 제비들도
가가 거거 나나 너너
노인대학에서 가가 거거 나나 너너
책 읽는 소리에 임자도 봄날은
오랜만에 사람 사는 동네 같다
임자도엔 꽃 같은 사람만 가라․15
―감국甘菊
겨울이 오는 초입
목감기에 걸린 아침 햇살이
따끈한 차 한 잔을 달라 한다
궁둥이 뜨끈한 아랫목을 내어주고
감기몸살에 좋다는 감국을 끓이며
잠시 감국에게 조의를 표해야겠다
누가 심은 것 같지도 않은
그래서 귀하게 여기지도 않은
담장 밑에 아무렇게 피어 있는 감국을
쑹덩쑹덩 목을 자를 생각이 났는지
좋은 사람을 위한 명분이
저들에겐 독이 된다는 것을
손끝에서 파르르 떨리는
소리 없는 비명을 들으며
순교한 사도 바울처럼
내 영혼을 위해
한 편의 시로 헌납해준
감국, 너에게 조의를 표한다
임자도엔 꽃 같은 사람만 가라․16
―제비․1
제비들
양옥집에만 집을 짓는다
물어다 줄 박씨도 없는데
궁상맞은 푸념이 듣기 싫단다
큰채 작은채 별채까지
식구를 늘려도 부담 없는 집
약았다고 혀를 쯧쯧 찼더니
그게 다 사람한테 배웠단다
임자도엔 꽃 같은 사람만 가라․17
―제비․2
수차례 경고를 무시한 채 현관에다 집을 짓는 제비들
주인을 무시하는 처사가 괘씸하여 남편에게 철거를 요청했다
우리말을 엿들은 제비들 지상권을 주장하며
우리를 빙 둘러싸고 철거만 해보라고
깨알 같은 눈을 치켜뜨고 공중시위를 한다
우리의 터전을 보장하라
우리의 터전을 보장하라
무단침입 죄 고성방가 죄로 집어넣어 버려
남편의 목울대가 꿈틀하는데도
천막농성도 불사하겠다는 충혈된 저 눈
달동네 사람들 같다 달동네 사람들
결국 포기각서 대신 빗자루를 버렸다
농성은 해제되고 평화로운 봄날이다
임자도엔 꽃 같은 사람만 가라․18
―봄․1
완주를 앞둔 마라토너처럼 봄은 달려온다
병아리 눈물 같은 비가 자주 오면서 봄은 가속도를 내고
드디어 입성을 한 매화꽃
뒤이어 제비꽃 패랭이꽃들 줄지어 입성을 한다
어렵다 죽는다 세상은 뒤죽박죽인데
지상의 꽃들은 묵묵히 꽃으로 대답하고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꽃으로 대답하는
장하다 봄을 빛낸 마라토너들
임자도엔 꽃 같은 사람만 가라․19
―봄․2
지껄이는 병아리 소리 같기도
프라이팬에 깨 볶는 소리 같기도 한
비가 종일 내린다
여자의 분비물 같은 질척거리는 흙 밭에선
파-란 생명들이 산란을 꿈꾸고
양수 터지듯 마른 햇볕 한줌 툭 하고 터지자
일란성 이란성 생명들이
대기리에 봄을 파종하고 있다
임자도엔 꽃 같은 사람만 가라․20
―가을
오메!
낯 뜨거워라
바지랑대 위에
한낮의 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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