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흠 한광구 서안나 이인원 이태규 박형준/ 시
경계의 상상력
김수목
(시인)
*이대흠, 「바닥」(『창작과 비평』 06년 가을호)
*한광구, 「아버지란 이름」(『문학과창작』 06년 가을호)
*서안나, 「곡선의 힘」(『문학과창작』 06년 가을호)
*이인원, 「도서관 간다」(『시와반시』 06년 가을호)
*이태규, 「아우슈비치」(『문학과창작』 06년 가을호)
*박형준, 「달팽이」(『시와반시』 06년 가을호)
1. 첫머리에
네 살쯤 되는 아이들의 커다란 특징 중 하나는 상상력이다. 상상력을 뛰어넘는 놀라운 공상은 어른들이 걱정하는 거짓말로 나타나게 되고 현실과 뒤범벅이 된다. 이 무렵의 아이들은 자기 자신과 사물을 동일시하여 모든 사물에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상력과 공상이 매우 활발해진다. 만화 영화와 공룡, 괴물, 우주인 등의 상상 속의 세계는 아이들의 마음과 일치되어 무한한 공상의 세계로 아이들을 이끌어간다.
이런 상상력 속의 아이가 자라면서부터 현실을 깨닫고 현실에 순응하면서 상상력은 빛 바래지고 무디어져 간다. 그리고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된 후에는 상상력은 누구에게나 아무 때나 찾아오는 것이 아닌 특별한 것이 되어버린다.
진중권은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에서 상상력의 혁명을 이야기하고 있다. “상상력의 혁명은 논리적·추론적·선형적 사유를 배제하지 않고 그것을 전제하고, 그 한계를 뛰어넘는다. 그것은 합리성이 창의성을 억누르는 지점에서 행하는 즐거운 반역이고 교육을 통해 획득한 익숙한 사유의 습관을 버리는 것처럼 어려운 것은 없다.” 라고 말한 다음 “하지만 실은 그것처럼 쉬운 일도 없다. 어린 시절의 놀이정신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라고 하며 명쾌한 해답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어른이 된 후에도 어린 시절의 거짓말처럼 현실과 사유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상상력을 간직한다면 세상 살아내기가 훨씬 수월해지지 않을까.
시가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건 누구라도 잘 알고 있는 명제이다. 하지만 시를 쓰고 또 읽는 일을 업으로 삼는 나는 늘 그 상상력의 보폭을 미심쩍어했다. 신화를 읽으면서 조상들의 상상력의 확장에 놀라면서도 이게 어디까지 상상이고 현실인지를 늘 궁금해 했던 것처럼 말이다. 모든 문학 작품들이 픽션이냐 논픽션이냐의 구분이 애매한 정도의 현실에 가까운 상상력이 있는가 하면 공상만화나 SF처럼 터무니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상상력도 있다. 어릴 적 공상만화의 터무니없음을 현실로 착각하여 일을 저질러 버리던 철부지의 감정이 어른이 된 후에는 시를 읽어내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경우도 있어 난감하다.
서정주의 「자화상」에서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라는 구절에 과연 시인의 아버지는 종이었을까 하는 우문에 걸려 더 이상 시 읽기가 나아가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작은 의문에 걸리기 보다는 시적 화자의 진술에 무게를 두어 시를 읽어 나가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꿈을 꾸며 산다. 또한 인간은 그 꿈을 현실로 만들려고 산다.
여기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시로 태어나는 행복한 세상이다. 또 이제 인간이 가진 가장 큰 에너지인 상상력의 세계로 가봐야겠다.
2. 바닥살이
외가가 있는 강진 미산마을 사람들은
바다와 뻘을 바닥이라고 한다
바닥에서 태어난 그곳 여자들은
널을 타고 바닥에 나가
조개를 캐고 굴을 따고 낙지를 잡는다
살아 바닥에서 널 타고 보내다
죽어 널 타고 바닥에 눕는다
바닥에서 태어난 어머니 시집올 때
질기고 끈끈한 그 바닥을 끄집고 왔다
구강포 너른 뻘밭
길게도 잡아당긴 탐진강 상류에서
당겨도 당겨도 무거워지기만 한 노동의 진창
어머니의 손을 거쳐간 바닥은 몇평쯤일까
발이 가고 손이 가고 마침내는
몸이 갈 바닥
오랜만에 찾아간 외가마을 바닥
뻘밭에 꼼지락거리는 것은 죄다
어머니 전기문의 활자들 아니겠는가
저 낮은 곳에서 온갖 것 다 받아들였으니
어찌 바닷물이 짜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대흠, 「바닥」
시를 읽을 때 흔치 않는 경험이 자신의 체험과 맞아 떨어질 때 그 시에 대한 애착은 각별한 것이 된다. 나 역시 고향의 강진뻘 바닥을 바닥이라 했고 “강진 멸치젓 장수”가 나를 낳아준 어미였다는 놀림을 숱하게 듣고 자랐다. 물론 훗날 어른들이 놀리려고 지어낸 말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당시에는 그게 진짜인 줄 알고 장날이면 멸치젓 동이들이 나란히 놓여 있는 어물전에 기웃거려 보기도 했고 한동안 계모 콤플렉스에 시달리게 된 원인이기도 했다.
또 고흥의 어느 섬마을에서 몇 해 동안 널을 타고 굴도 따고 조개도 캤던 젊은날이 상채기로 되살아났다. 넓은 송판을 대패로 잘 밀어 반들거리게 한 다음 거기에 몸을 싣고 한쪽 발로 뻘을 밀면 쭉쭉 잘도 미끌어져 나가 밀물이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조개를 캐다 물살에 갇혀 혼이 난 일도 있었다.
“살아 바닥에서 널 타고 보내다/ 죽어 널 타고 바닥에 눕는다”라는 말이 내게는 너무 실감나게 다가온다. 바닷가 아낙들의 힘겨운 삶의 여정이 그대로 내게도 전해지기 때문이다. 노동의 현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고된 삶이었다. 사는 것이 이런대로 저런대로 고되고 힘든 삶을 ‘바닥살이’라고 한다. 바닥살이같은 삶을 살아온 우리네 어머니였다.
바다의 뻘 바닥에서 태어나 바닥에서 자랐던 어머니는 시집을 와서도 그 바닥을 버리지 못한다. “길게도 잡아당긴 탐진강 상류에서/ 당겨도 당겨도 무거워지기만 한 노동의 진창/ 어머니의 손을 거쳐간 바닥은 몇평쯤일까”라고 시인은 어머니의 삶을 되묻는다. 바다를 떠났어도 논과 밭을 바닥 삼아 평생을 보내신 어머니의 바닥은 헤아릴 수 없는 평을 가지고 있다.
또한 여기에서 바다의 의미는 어머니와 동격이다. 가장 낮은 곳에서 세상의 모든 오물을 다 받아들이듯이 “저 낮은 곳에서 온갖 것 다 받아들여” 짜지 않을 수 없는 바닷물처럼 어머니의 눈물도 바닷물처럼 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머니의 전기문에 쓰인 활자가 모두 “뻘밭에 꼼지락거리는 것”이 된 것처럼 자식들도 뻘밭에서 꼼지락거리는 것이 된다. “내 이야기를 썼으면 소설책 몇 권은 될 것이여.”라고 말하는 우리 여인네들에게 자식들은 꼼지락거리는 전기문에 쓰인 활자가 되는 것이다.
바다의 뻘 바닥인 어머니가 있다면 한광구 시인의 「아버지란 이름」에서는 자신이 아버지가 되어 살아온 인연을 이야기한다.
3. 인연의 끈
이보시게, 모래알 같이 수많은 인연 중에 자네가 한 남자로 태어난 건 하늘의 축복이지, 자네가 부모를 만나는 인연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그동안 하늘을 섬기며 건강하게 살아왔고 또 유정有情한 인연으로 한 여자를 만나서 세상의 법대로 한 가정을 이루고 또한 인연으로 아이를 얻고 아버지란 이름을 얻었네. 이제부터는 사람의 법으로 살기보다 하늘의 법으로 살아야 하네. 생명은 하늘에서 내리시니 하늘의 숨결 받은 몸을 서로 나누고 서로 섬기는 것이 사랑의 근본이지만 핏줄로 맺어진 육정肉情을 넘어 하늘이 내려주신 바위를 안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만 핏줄의 인연이 하늘로 오르고 땅으로 뿌리내려 세상을 구한다네. 이보시게, 자네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이 다시 태어난다네.
―한광구, 「아버지란 이름」
세상 살아가는 지혜를 담담한 목소리로 알게 해주는 시였다. 시의 첫머리에서 “이보시게,”라고 나직하게 부르는 소리는 어느 정도 세상을 살아낸 남자들이 친구를 부를 때나 자신을 성찰할 때 부르는 호칭이다. 차분하게 인생을 관조하며 부르는 첫 소리에 시를 읽는 독자들은 더 깊이 자신을 성찰해보게 된다. 하늘의 법法이 자신에게 어떤 시련이었고 아픔이었을지라도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한 남자의 포용력 있는 삶의 자세 앞에서는 인연이 된다.
인(因)이란 삼라만상의 근본 원인이며 결과를 낳게 하는 내적인 직접원인을 말하며 연(緣)이란 인을 도와서 결과에 이르게 하는 외적(外的)인 간접원인 말한다. 우주 삼라만상의 일체의 현상은 인과 연이 화합해서 생사, 생멸을 되풀이하면서 맺어진 것을 우리들은 흔히 인연(因緣)이라고 보는 게 불교적 해석이다. 이런 사전의 해석을 차지하고서라도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누군가와 인연을 맺고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한 남자로 태어난 건 하늘의 축복이”라고 한다. 시인이 자신에게 되묻는 듯 고백이 뒤따른다. 부모를 만나 태어나고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얻는 가장 평범한 인간의 삶이 시인에게는 “유정한 인연”이다. 이렇게 사람의 법대로 살아왔지만 이제는 “하늘의 법”으로 살아가라고 말한다. “생명은 하늘에서 내리”고 “하늘의 숨결 받은 몸을 서로 나누고 서로 섬기는 것이 사랑의 근본”이지만 “하늘이 내려주신 바위를 안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만 핏줄의 인연이 하늘로 오르고 땅으로 뿌리내려 세상을 구한다.”라고 했다.
자식이 되어보고 부모도 되어보고 자신을 조용히 성찰하며 자신이 “자네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이 다시 태어난다.”고 고백하는 시인은 우리에게 삶의 지표를 제시해준다.
4. 천천히 가기
남한산성을 내려오다 곡선으로 휘어진 길을 만난다
차가 커브를 도는 동안
세상이 한쪽으로 허물어지고
풍경도 푸름의 중심을 놓아버린다
내 생의 무게 중심이 삽시간에 흐트러진다
나는 나에게서 한참 멀어져 있다
나는 모서리처럼 몸을 세우고 곡선의 격렬함과 싸운다
내 몸에서 중심을 붙잡으려 손길들이 뛰쳐나온다
모든 것을 움켜쥐려 하던
수많은 내가 와르르 쏟아져 내린다
나에게서 내가 이탈된다
커브길을 돌아 나에게 되돌아오는 몇 초 동안
나의 경계를 넘어서고
나의 슬픈 배후까지 슬쩍 엿보게 하는
부드러운
곡선의 힘
―서안나, 「곡선의 힘」
자를 대고 직선을 그린다. 자를 누른 손에 힘을 꽉 주고 숨을 고른 다음 곧바로 직선 하나를 그으려 하지만 자는 연필의 힘에 밀려 이내 삐뚤어진 선 하나를 내어 놓는다. 아무리 곧은 선을 만들어 내려고 해도 곧잘 삐뚤어져 버리는 줄긋기처럼 살아가면서 똑바른 것을 선호해왔다. 줄도 똑바로 서야 하고 모든 것은 규칙적으로 각에 서 있어야한다. 조금씩 삐뚤어지고 부드러운 곡선을 왜 용납하지 않으려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바른 것이 정의인 것처럼 말이다.
시인이 운전을 하며 가는 길은 커브를 지나면 또 커브가 나오고 몇 번의 굽이를 돌아야 하는 남한산성의 길이다. 굽이 도는 커브에 휩쓸리다보면 운전에만 온 신경을 집중시켜야 하고 그러다 보면 풍경을 놓치게 된다. 그래도 핸들을 놓치지 않으려면 커브의 힘에 밀려가 주어야 한다. 원심력과 구심력 같은 과학적 지식을 동원하지 않고서라도 커브에 충실해야 한다. 그러다가 “세상이 한쪽으로 허물어지고/ 풍경도 푸름의 중심을 놓아버리”는 경지에서 시인은 자신이 “나에게서 내가 이탈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아주 짧은 몇 초의 순간에 자신을 뛰어 넘는 “나의 경계를 넘어서고/ 나의 슬픈 배후까지 슬쩍 엿보게 하는” 초월의 경지에까지 도달하는 것이다.
이것은 직선으로 쭉 뻗은 아우토반 같은 고속도로에서는 전혀 맛볼 수 없는 경지다. 속도로만 경쟁하는 곳에서는 배후까지 되돌아볼 여유가 없다. 천천히 가면서 부드럽게 돌아가야 볼 수 있다.
5. 도서관에서 길찾기
질기고 긴 문장 붕대로 꿈틀대는 그리움을
꽁꽁 殮해 두러 간다
과월호 잡지 신세 같은 쓸쓸함을
훌훌 거풍시키러 간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에도 깨서 보채는 외로움을
고문서보다 깊은 잠재우러 간다
머릿속에 빼곡한 ‘너’라는 낱말을
모조리 삭제하러 간다
고전이 되지 못할 내 비밀을
고전 속에 암호처럼 밑줄 그어두러 간다
끝내 못 다 읽은 어떤 사랑이야기를
아쉽지만 기일 반납하러 간다
온갖 잡다한 사연 다 끌어안고도 의연한 도서관을
눈꼽만큼이라도 닮으러 간다
―이인원, 「도서관 간다」
세계 최초의 도서관을 찾다가 흥미로운 자료를 발견했다. 세계 최초의 도서관은 바빌로니아의 수도 니폴의 사원 자리에서 설형문자가 새겨진 점토판이 발견되어 옛 도서관 자리가 아니었을까 추측하기도 하고, 고대 이집트의 유적에서도 점토판이 발견되었는데 라메스 3세의 궁전에는 ‘영혼의 요양소’라고 적은 곳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도 역시 도서관 자리일 거라고 추측하는데 도서관을 영혼의 요양소라고 했다니 고대 사람들도 책을 병든 영혼을 치유하는 병원으로 생각했나 보다.
이인원 시인의 「도서관 간다」를 읽다보니 나도 외롭거나 쓸쓸할 때 도서관에 갔다는 생각이 났다. 나도 버릇처럼 틈만 나면 시립도서관에 간다. 널찍한 시청 광장을 가로질러 시의회 건물 옆의 도서관으로 간다. 이곳에만 가면 이 도시에는 한가롭고 평화로운 중산층들만 살고 있는 듯하다. 그 곁에 도서관이 있다. 사람은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 외로워지나 보다. 그래서 나도 책 속에 그리움을 묻고 쓸쓸함을 묻었다. 그리움을, 쓸쓸함을, 외로움을, “꽁꽁 염해 두”기도 하고 “훌훌 거풍시키”기도 하였고, “깊은 잠재우러 가”기도 하였다.
책을 읽다보면 배우고 읽은 것들에 의해 충만해지기도 하지만 가슴 깊이 울리는 책은 오히려 머릿속을 텅 비게 하기도 한다. 도서 십진분류법에 의해서도 나누어지지 않는 사랑은 대출 기한 전에 반납해야 한다.
영혼의 요양소였던 옛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시인에게도 역시 도서관은 “온갖 잡다한 사연 다 끌어안고도 의연한” 요양소이자 용광로였다.
6.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아우슈비치에는 아직도
까마귀 떼가 떠나지 못하고 있다
어린이 젊은이 노인
여자 남자,
유태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육당한
현장 아우슈비치
한치 앞을 보지 못한
한으로 끔뻑이는 수십만 개의 안경테
고향의 흙모래를
아직도 털어내지 못하고 있는 신발들
부푼 꿈을 가득 채워와
한번 열어보지도 못한 가방들
살육당하기 전에
잘린 탈색된 머리카락들
그 주인들의 통곡소리
수용소로 연결된 화장터에서
뼈 빻는 소리,
나는 보았다
횐 눈으로 뒤덮은
그 원혼들의 한을
원혼의 눈동자가 되어
떠나지 못하는 까마귀 떼를
―이태규, 「아우슈비치」
시인이 방문했던 아우슈비치의 하늘에는 60여 년이 지났을 그때까지도 까마귀떼는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늘을 맴돌며 가스실에서 뿜어져 나오던 연기를 맡으며 살육의 현장을 기억하고 있었다. 전율처럼 시인은 자신이 그당시의 처참한 수용소로 들어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 시인은 유태인들이 수용되어 있던 막사를 하나씩 관람할 때 유태인들이 버리고 간 물품들을 모아둔 전시실을 보면서도 자신의 것처럼 느낀다. 주인을 잃은 지도 수십 년이 지났고 또 전시된 후에도 많은 세월이 흘러 그들의 자취 위에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다. 그 전시물 앞에서 시인은 자신도 똑같은 고통을 경험한다. 안경테, 신발, 가방, 머리카락들은 사람들의 일상이다. 일상이 철저하게 유린된 현장에서 영혼은 원혼이 된다. “원혼의 눈동자가 되어 ” 수용소 하늘 위를 떠나지 못한다.
아우슈비치의 정문에 걸렸던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문구는 지금도 내 맘 속에 걸려 있다. 노동이 자신을 자유케 한다는 말은 죽음을 맞아서야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었던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7. 지상의 시간
달팽이 한 마리가 집을 뒤집어쓰고 잎 뒤에서 나왔다
자기에 대한 연민을 어쩌지 못해
그걸 집으로 만든 사나이
물집 잡힌 구름의 발바닥이 기억하는 숲과 길들
어스름이 남아 있는 동안 물방울로 맺혀가는
잎 하나의 길을 결코 서두르는 법 없이
두 개의 뿔로 물으며 끊임없이 나아간다
물을 먹을 때마다 느릿느릿 흐르는 지상의 시간을
등허리에 휘휘 돌아가는 무늬의 딱딱한 껍질로 새기며,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연기에 섞여
저녁 공기가 빠르게 세상을 빠져나갈 때
저무는 해에 낮아지는 지붕들이 소용돌이치며
완전히 하늘로 깊이 들어갈 때까지,
나는 거기에 내 모습을 떨어뜨리고 묵묵히 푸르스름한,
비애의 꼬리가 얼굴을 탁탁 치며 어두워지는 걸 바라본다
―박형준, 「달팽이」
박형준 시인의 「달팽이」를 읽자 동명의 제목인 문인수 시인의 「달팽이」가 생각났다.
검은 수렁 한복판을 느릿느릿 간다
저런 절 한 채를 뒤집어쓰고 살
수 있다면……
동해안 아름다운 길 길게 풀린다.
―문인수, 「달팽이」
문인수 시인의 「달팽이」가 검은 수렁 한복판을 절 한 채 뒤집어 쓰고 사는 관조와 여유라면, 박형준 시인의 「달팽이」도 역시 삶을 관조하는 넉넉한 자세다.
요즈음처럼 집이 화두가 되어 떠돌아다닌 적이 있었을까. 하루 밤 사이에도 억, 억 씩 뛰는 아파트 값에 모두 미쳐서 돌아가는 것 같은 세상에 집은 구원보다 절실한 꿈이 되어버렸는지 모른다. 이런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집을 등에 지고 태어난다면 이렇게 “자기에 대한 연민을 어쩌지 못해” 그걸로 집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집을 등에 지고 난 사나이는 길을 간다. 어차피 길이 인생의 행로인 것을. “두 개의 뿔로 물으며” 끊임없이 나아가는 인생 행로인 것이다.
자신이 세상을 살아갈 때 “느릿느릿 흐르는 지상의” 시간은 “등허리에 휘휘 돌아가는 무늬의 딱딱한 껍질로 새겨”진다. 등에 진 달팽이 무늬의 딱딱한 껍질은 두꺼워질 때마다 지상의 시간이 새겨진 흔적이다.
저녁 쯤 되면 마을에 자욱하게 깔리던 연기며, 저무는 해며, 그리고 어둠이 이 모두를 삼켜 버리는 그 때까지도 하늘까지도 먹빛으로 되는 때까지. 그리하여 남는 것은 무거운 집을 등에 진 채 비애의 꼬리가 탁탁 치는 걸 들어야 하는 시간이다. 이것이 지상의 시간이다.
8. 마무리에
이번 시평을 쓰면서 유독 나의 개인적인 체험에 맞아 떨어지는 시를 많이 골랐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대흠 시인의 「바닥」은 나의 젊은 날의 섬 생활 체험이었고, 이태규 시인의 「아우슈비치」는 지난 여름 동유럽 여행에서 갔던 곳이었다. 그리고 서안나 시인의 「곡선의 힘」의 배경이 된 남한산성의 커브 길은 한 달에도 몇 번씩 오르내리는 근교의 산이다. 또 이인원 시인의 「도서관 간다」도 역시 자주 도서관에 다니는 나의 체험과 맞아 떨어지는 시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늘 보고 겪고 느끼는 일들을 다른 사람이 다른 상상력을 불어 넣었을 때 그 감동이 더욱 커지게 마련인가 보다.
이 가을이 오기 전까지는 산야에 피어 있는 모든 국화류는 나에게서 “들국화”로 불려졌었다. 물론 식물도감에도 없는 들국화라는 말로 그렇게 무관심 속에서 그냥 들국화였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들국화들이 하나하나 다른 이름으로 내게 나타났다. 구절초, 벌개미취, 쑥부쟁이, 감국, 산국, 해국이 다 구별된 것이다. 여름이 다 가기 전에 가을을 알리려 가장 먼저 피어나는 벌개미취, 흰색의 꽃잎이 한 그루에 하나씩 달려 있는 구절초, 정신없이 꽃들이 다닥다닥 피어 있는 쑥부쟁이, 그리고 타원형의 조금 넓은 잎을 가진 해국, 작은 꽃들이 노랗게 핀 감국 등 이제 그들의 이름은 나에게 그들의 자태와 함께 기억된 것이다.
뭉뚱거려 그냥 들국화로 불러왔던 가을의 국화류들처럼 상상력의 경계에서 애매한 포즈로 시를 쓰고 읽어왔던 것을 반성한다. 상상력의 확장을 위하여 상상력의 경계에서 과감하게 탈출하게 되기를 빌어본다.
'신춘문예시 2018-2019'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춘 (0) | 2013.05.21 |
---|---|
이성복 (0) | 2013.05.21 |
[스크랩] 2012년 신춘문예 당선작 (0) | 2012.01.12 |
성나무 앞에서의 목례/ 이승하 (0) | 2011.08.26 |
오른손은 모르개/ 이장욱 (0) | 2011.08.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