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스크랩] 모딜리아니의 미술과 이성복·이영애·고재종의 시

네잎 2014. 11. 30. 17:20

모딜리아니의 미술과 이성복·이영애·고재종의 시

 

 

강 경 호

 

 

  모딜리아니는 에콜 드 파리의 사람들 가운데 많은 전설에 싸여있는 화가이다. 그는 술이 몸에 들어갔을 때 평상시와는 다른 격렬한 행위를 하였다. 그러나 이젤 앞에 서면 준열한 모습으로 눈빛이 빛났다. 부르조아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평생 가난했고, 고독했지만 늘 그는 인간의 내면을 응시한 화가였다.

이메데오 모딜리아니 

 

 36년이라는 짧은 생애와 미술에 눈 뜬 이래 겨우 22년이라는 생활 속에서도 그는 끊임없이 인간을 표현하였다. 그에게 인간의 생명을 응시하는 일은 생명을 증명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육체에게 말을 걸고 이야기하는 것이 예술의 전부였다. 그래서 그가 응시하는 생명은 관능의 밑바닥에 흐르는 애틋하고 순진한, 그리고 고독한 영혼의 호흡이었다.

  모딜리아니는 초상과 인체조각, 그리고 나부에 관심이 깊었다. 그렇기 때문에 풍경은 거의 그리지 않았다. 인간의 모습에서 그는 깊은 생명의 고독한 영혼의 소리와 본능적인 정념의 고동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고전을 향한 관심에서 출발하였으나, 고전을 버리고, 세잔·로트렉·피카소 그리고 아프리카 니그로의 조각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그렇지만 누구의 영향을 받았다거나 누구의 자극을 받아 작품이 크게 변했다는 근거는 전혀 없다. 그의 삶처럼 그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36년이라는 짧은 생을 살다 간 모딜리아니의 생애는 슬프고 처연하다. 술과 마약으로 망가진 육체는 그를 끝에 죽음으로 몰고 갔다. 그래도 그가 죽기 전 2~3년은 행복했을 것이다. 19살의 청순한 소녀 잔 에뷔테른을 만나 그녀와의 사이에 딸을 낳고 또다시 아내의 뱃속에 둘째 아이가 자라고 있었지만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하던 잔 에뷔테른의 부모를 설득하지 못하고 모딜리아니는 술을 마시면 처가 앞에서 홀로 기다리다가 돌아가기 일쑤였다.

  모딜리아니의 죽음을 전해받은 아내는 영안실에서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입맞춤을 나누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6층 건물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동행하기 위해 투신하고 만다.

슬픈 모딜리아니의 삶을 말해주듯 그의 그림은 우울하고 슬픔의 정서가 묻어난다. 아몬드 모양의 파란 눈과 긴 코, 긴 목, 작은 입, 그리고 오래 다이어트 한 듯한 여인의 육체 또한 슬픔이 배어난다. 그렇지만 관능적인 육체를 지닌 여인의 모습에서조차 착한 사람의 영혼이 엿보여진다.

일생을 크게 성공하지 못한 작가로 살다가 성공을 눈앞에 둔 시기에 떠난 기구한 운명의 모딜리아니가 세상을 떠나간 지 92년이 흘러갔다. 그러나 그의 예술은 그의 불행한 삶을 위안해주고도 남을 것이다. 그의 예술을 통해 우리는 영혼이 아름다운 인간의 눈빛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을 통해 그가 바라보았을 생명의 아름다움도 느낄 수 있으니 그는 죽었어도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있는 것이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는 1884년 7월 12일 이탈리아의 리보르노에서 아버지 플라미니오 모딜리아니와 어머니 에우제니아 가르생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리보르노는 항구도시로 그의 생가는 유대상인들이 모여사는 곳이었다. 그의 어머니 에우제니아 가르생은 교양있고 늘 활력이 넘쳤으며 문학적 소양을 지닌 여성이었다. 모딜리아니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모딜리아니에게 문학에 대한 열정을 심어주었다. 이러한 영향 때문에 모딜리아니는 평생 문학서적을 읽어 인문학적 소양을 쌓는다. 그러나 아버지 플라미니오는 일 때문에 집을 떠나 있었으며 모딜리아니가 그림그리는 것을 반대했다. 오직 경제적인 부분에만 관심이 컸다.

  모딜리아니는 늘 건강이 좋지 않았다. 1895년 심하게 늑막염을 앓고 난 후 1898년 8월에 다시 장티푸스를 앓았다. 이때 모딜리아니는 정신착란 상태에 빠져 회화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렇듯 병약함이 그를 회화에 이끌었으며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발전시키는데 토대가 되었다.

  1898년 자유로운 사고를 지녔던 모딜리아니의 어머니는 굴리엘모 미켈리에게서 처음으로 회화를 배우게 했다. 미켈리는 뛰어난 후기 점묘주의 화가였다. 그는 제자에게 화가로서 나아갈 길을 가르쳐 주었다. 모딜리아니는 하루 종일 그림만 그렸는데 가끔 스승을 놀라게 하는 재능을 보였다.

 

 

장밋빛 누드(1917년)

 

  1900년 가을, 모딜리아니는 폐렴에 걸렸다. 의사의 권유로 ‘요양여행’을 떠났는데 이탈리아 미술의 중심지인 피렌체·로마·나폴리·베네치아를 방문했다. 그는 14세기의 시에나 미술에 매료되었는데, 특히 조각가 티노의 작업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01년 5월 모딜리아니는 피렌체의 누드학교에 입학하였다. 1903년 봄, 그보다 일곱 살 연상이며 정신적으로 이끌어주던 길리아와 격렬한 논쟁을 벌인 후 베네치아를 여행하면서 후기인상파를 접했다.

  1906년 봄, 모딜리아니는 처음으로 파리에 갔다. 이때 파리는 야수파 화가들의 강렬한 색채를 자유롭게 표현한 작품들이 평단의 물의를 일으키고 있었는데 1907년 피카소는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그렸다. 이 작품을 통해 피카소는 전통적인 미학에 비해 새롭고 다양한 창조적인 사고방식과 회화양식으로 화단의 인정받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파리에 입성한 모딜리아니는 파리의 새로운 문화의 예술적인 풍토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당시 유럽의 아방가르드 예술운동이 집단적으로 이루어진 것에 반해 모딜리아니는 귀족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해 여러 예술사조들 가운데서 소외당하고 희생당한 예술가로 비쳐졌다. 20세기 초, 이름있는 화가들은 대부분이 그룹에 몸담고 있었지만, 모딜리아니는 오랫동안 아방가르드 문화운동이나 평론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렇지만 미술사는 매우 아이러니하게 전개되었다. 마치 19세기 말, 세잔이 미술사조에서 고립된 채 활동했지만 프랑스 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것처럼, 모딜리아니의 고집과 무관심도 20세기 미술사에서 독특하고 특별한 지위를 얻게 된다. 이러한 배경에는 그의 문학적 관심과 무관하지 않는다. 모딜리아니는 상징주의와 데카당스 문학사조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머니, 할아버지, 이모 등의 가족이 문학과 사회, 철학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이 만들어낸 가족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크로포트·니체·단테·카르두치·오스카 와일드·보들레르를 읽으며 문학적 소양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1909년부터 1914년 까지 모딜리아니는 조각가로서 여러 가지 예술적 실험을 하였다. 그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각은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된다. 루마니아 출신 브랑쿠시에게서 재료를 깎아나가는 조각방법과 형상이 가진 숭고함과 조형적 긴장감이 무엇인지를 배운다. 조각가로서의 경험을 통해 아르카익하고, 서정적이며, 우아하고, 섬세하고, 순수한 형상을 양식적으로 발전시켜 자신의 미적 이상을 정립하기에 이른다. 이 무렵 모딜리아니는 ‘여인상 기둥’을 소재로 한 여러 점의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들은 회화적 기법과 조각에서의 경험을 반영한 것이다.

  이후 조각을 접은 후에도 조각의 본질적 문제인 양감을, 회화를 통해 해석해낸다. 이러한 모딜리아니의 회화를 오스발도 파타니는 “그는 새롭게 알게 된 문화적 차이에서 조각을 위한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하였다. 모딜리아니는 다양한 관점과 형상에 관한 연구를 통해, 아프리카와 이집트 미술을 뛰어넘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여인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표현해 낸다. 이는 1300년대 시에나 미술의 서정성과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서 보이는 우아한 표현방식을 연상시킨다.

  1915년, 조각을 그만 둔 모딜리아니는 그동안 열정을 보였던 조각에서 터득한 미적세계를 회화에 적용시킨다. 긴 목과 코, 그리고 작은 입술, 어딘가 모르게 슬퍼 보이는 표정을 한 모딜리아니의 양식적 표현을 정립하게 된다. 이 작품세계는 그가 죽은 1920년 까지 지속적으로 보여주는데, 5년 남짓한 이 시기에 그린 작품들이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모딜리아니풍인 것이다.

 

 

 

잔 에뷔테른 -화가의 아내(1918년)

 

  이른바 모딜리아니풍의 독특한 회화양식은 전통적인 회화기법을 뛰어넘어 인간의 본질을 조망하는 순수한 형상으로 인물의 심리, 양감, 마티에르를 통해 대상을 일관성있게 묘사한다. 모딜리아니의 형상에 대한 연구와 양식, 그리고 완숙한 작품세계는 새로운 회화적 접근이자 그의 조각경험과 관련 있다. 그는 세잔이 추구한 공간과 입체의 표현을 넘어 ‘아라베르크’한 양식이라고 부르는 독특한 표현방식을 창안하였다.

  모딜리아니의 인문학적 관점은 당대의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근대성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인물이 지닌 도덕적 감성과 모델이 살았던 시대의 문화적 특징을 내면의 표현에 함께 녹여냈다. 그가 추구한 ‘깊이에의 탐구’는 세잔의 작품을 내면적이고 역동적이며 심리적인 방식으로 독해한 것에서 비롯됐다. 이러한 모딜리아니의 회화는 근대적인 논리를 뛰어넘어 순수한 신화를 만들어냈으며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는 열정의 결과였다.

  이처럼 근대미술사에 우뚝 선 모딜리아니이지만, 그러나 그의 생은 불행했다. 평생 병약한 몸으로 병마와 싸워야 했고, 무서울 정도로 이지적이며 부끄러움이 많은 순수했던 모딜리아니는 처음 파리에 입성했을 때만 해도 부르주아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나 고향에서 보내오는 돈이 떨어지고 그림은 팔리지 않는다. 절망 속에서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가 죽는 날까지 작품이 제대로 평가되지 않아 하루하루 연명하기도 힘든 시절인 1918년, 12년 전에 피카소에게 빌려준 100수가 100프랑이 되어 돌아오기도 하는 치욕을 겪게 된다.

 

 

 

첼리스트(1909년)

 

  그렇지만 모딜리아니는 가정적인 식탁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부랑자가 되어 그는 빈곤에 시달리면서도 그것을 영웅적으로 받아들이긴 했지만, 방랑생활을 경멸하고 증오했다. 그것은 지고한 예술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생긴 빈곤의 결과이기도 했으며 스스로가 만든 부주의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그는 누추한 집에서 살았고, 값싼 식당의 단골이었으며, 마약에 취해 있었으며, 소동을 일으켜 경찰서에 끌려가곤 하였다.

  그런 그에게도 행복한 적이 있었다. 아니, 그의 죽음은 비극적이었지만 행복했을 것이다. 폐병으로 목에서 피가 쏟아지고 심한 신장염으로 고열에 괴로워하면서 추운 방안에서 신음하였다. 1920년 1월 24일, 모딜리아니는 자선병원에 입원하였다가 영원히 눈을 감고 말았다. 그때 그의 아내는 뱃속에 9개월 된 아이가 있었다. 가눌 수 없는 슬픔에 빠진 그의 아내 잔 에뷔테른은 싸늘한 모딜리아니의 입에 오랫동안 입맞추고 자신의 친정으로 돌아와 투신하고 말았다. 모딜리아니의 장례식이 끝난 다음 날 모딜리아니의 영원한 애인 잔 에뷔테른의 슬픈 장례식이 이어졌다. 그리고 3년 후 모딜리아니와 잔 에뷔테른과 이 세상에 태어나보지도 못한 그들의 아이가 하나가 되었다.

  모딜리아니의 독특한 조각과 회화는 시인들에게 다양한 정서의 떨림을 주기에 알맞다. 모딜리아니의 미술세계가 깊은 문학적 소양에서 회화적 상상력을 발현한 측면이 강하고 시인들의 감성을 자극하기 알맞아 많은 영감을 제공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유년시절부터 병약한 몸 때문에 그림을 선택한 것과 술과 마약, 그리고 불규칙한 식사, 안락하지 못한 생활과 기행으로 얼룩진 일생은 전설이 되었다. 이러한 것들이 시인들에게 매우 재미있는 소재가 되기에 충분했다.

  여기에서는 이성복·이영애·고재종의 모딜리아니에 대한 상상력을 들여다보도록 한다.

 

여인의 얼굴은 막 자라나는 새싹을 감싸고 있다

 

그러니까 눈은 연둣빛 두 장의 떡잎이고

코는 아직 상처받지 않은 여린 줄기,

또 입은 양분을 다 뺏기고 쭈그러진 씨앗

 

어제도 많이 힘들었겠지만

내일 걱정을 다 쓸어담을 만큼

두개골의 용적은 충분하다

 

혹시라도 흐르는 눈물이 덜 업혀질까봐

따뜻한 곰보빵, 더 따뜻한 소똥 같은 머리 타래

뒤짱구 두개골 위에 덮어주고 나는 가만히 물어본다

 

“넌 열이 날 때 밤이 좋니, 낮이 좋니?”

 

그러면 가스라이터에 그을린 눈썹 없는 눈으로

싫은 표정을 하는,

가루투성이 나방의 번데기 같은 여인

                    -이성복, 「모딜리아니의 여인의 두상」 전문

 

 

 

 

안나 아흐마토비의 초상(1911~1912년)

 

  모딜리아니는 처음에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1909년부터 1914년 까지 조각을 하였다. 그렇다고 그가 조각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며 조각의 원재료인 돌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딜리아니는 조각에 대한 열정은 넘쳤지만 돌이 없어 건축자재 적재장에서 건축용으로 쓰는 석회석을 훔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음이 착한 이 청년은 경찰에 잡힐 것을 두려워 하고, 자신이 치졸한 절도범이 되었다는 것에 몹시 괴로워한다.

  1909년, 조각가 브랑쿠시 니그로 조각으로부터 강렬한 인상과 함께 이탈리아 시대에 알게 된 티노의 매력에 대한 회상들이 모딜리아니를 몰아세우며 조각에 대해 갈망하게 한다. 그에게 있어 조각이 지닌 구축성(構築性), 율동적인 선과 충실하고 견고한 볼륨과 결부되어 강한 자극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조각은 자신이 일관되게 추구해 온 예술의 본질인 것이며, 생명의 응집의 증좌인 것이다. 그는 그것을 간명하게 표현하려 했던 것이다.

  이성복의 「모딜리아니의 여인의 두상」은 모딜리아니의 조각작품 「두상」을 보며 쓴 시이다. 모딜니아니의 「두상」은 한 작품이 아닌데, 1911년, 1912년, 1913년에 제작한 작품들이 여러 점이 있다. 이성복이 본 「두상」은 머리가 가늘고 긴 모습을 수직으로 뻗은 코와 눈이 인상적이다.

 

 

 

 

잔 에뷔테른(1919~1920년)

 

  이성복은 조각을 보면서 제일 먼저 “여인의 얼굴은 막 자라나는 새싹을 감싸고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긴 코가 마치 식물의 줄기 같은데, 그 끝에 아몬드 모양의 떡잎을 닮은 두 눈이 달려 있다. 시인은 코와 눈을 식물에 비유하여 “눈은 연둣빛 두 장의 떡잎이고/코는 아직 상처받지 않은 여린 줄기,/또 입은 양분을 다 뺏기고 쭈그러진 씨앗”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1연과 2연을 식물성 이미지로 그린 것에 비해 3연은 “어제도 많이 힘들었겠지만/내일 걱정을 다 쓸어 담을 만큼/두개골의 용적은 충분하다”고 하였는데, 모딜리아니의 조각작품의 형상을 처음엔 얼굴을, 그 다음엔 얼굴을 포함한 ‘두상’ 전체로 시선을 확장한다. 시인이 바라보기에 두개골이 크기 때문에 지금껏 시적 대상이 힘들게 살아왔지만 내일의 걱정까지도 다 쓸어담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화자는 조각작품을 바라보며 어느 여인의 삶을 관조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의 시선은 머리쪽으로 시선을 고정시키며 바라보는데 머리를 “따뜻한 곰보빵” 같다고 했다가, “따뜻한 소똥 같은 머리 타래”라고 말한다. 이는 여인이 힘들게 살아왔기 때문에 눈물을 흘릴 때 “덜 업혀질까봐” 곰보빵 같고, 소똥 같은 머리 타래를 “뒤짱구 두개골 위에 덮어”줬다고 한다. 그리고 마치 모딜리아니가 조각을 하거나 그림을 그릴 때 대상을 한참동안 바라보며 대상의 내면과의 대화를 하는 것처럼 여인에게 “넌 열이 날 때 밤이 좋니, 낮이 좋니?” 하고 말을 건다. 시인이 평생 병약했던 모딜리니아의 정서를 반영한 것이다. 실제로 모딜리아니는 작품을 제작할 때 오랫동안 대상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대상이 자신에게 충분히 다가올 때만이 조각을 하거나 그 자리에서 단번에 그림으로 그렸는데, 수많은 초상화와 조각, 그리고 누드에서 대상의 영혼이 느껴지는 것은 모딜리아니의 인간을 내밀하게 교감하고 응시하는 태도에서 연유한 것이다.

마지막 연은 4연의 물음에 여인이 “싫은 표정을 하는,/가루투성이 나방의 번데기 같은” 표정을 짓는데, 이때의 눈썹 없는 눈은 “가스라이터에 그을린” 모습이다.

   이 작품은 식물성과 광물성, 그리고 곰보빵, 소똥, 가스라이터, 번데기 등 천방지축으로 다양한 이미지들이 시를 읽어가는 동안 충돌하며 교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여인의 얼굴은 막 자라나는 새싹을 감싸고 있다”는 서두의 이미지가 시 저변에 흐른다. 그렇기 때문에 몸에서 열이 나고 어제도 힘들어 상처진 삶을 살아왔지만 내일의 걱정을 포용할 줄 아는 존재의 이미지가 강렬하다. 특히 “눈은 연둣빛 두 장의 떡잎이”고 “코는 아직 상처받지 않은 여린 줄기”이기 때문에 희망에의 의지가 살아있다.

  그런데 이 작품을 들여다보며 작품 속의 시적 대상인 “번데기 같은 여인”이 “양분을 다 뺏기고 쭈그러진 씨앗”처럼 희생성을 상징하는 어머니 같은 존재로 생각되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내일 걱정을 다 쓸어담을 만큼/두개골의 용적”이 “충분”한 여인이기 때문은 아닐까?

이성복의 「모딜리아니의 여인의 두상」은 어딘가 모르게 그로데스크한 데가 있어 시의 의미를 정확하게 읽어내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영애의 「여인의 초상」은 아주 쉽게 그 의미가 다가온다.

 

시간의 간극은 깊고도 넓다

다급해진 발자국들,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한밤을 흔든다

나간 심장을 겨우 불러들여

응급실 산소마스크에 생을 의지한 여자

그녀 옆을 지키는 풀벌레가

화면 속에서 간간이 울고 지나간다

의식을 떠난 통증은 굳게 닫혀 있다

생각, 몸놀림, 모두 통화불능

벼랑의 끈을 놓은 듯 그녀는 평온하게

뜻 모를 바닥으로 깊숙이 떨어지고 있다

어스름 동굴 술렁이는 빛깔 따라

막막한 동공엔 박쥐들이 날고

몸 속 푸른 이끼의 날들 길게 감겨 나온다

마알간 이슬방울처럼 링거병을 타고

액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그녀

붉은 물감으로 수혈 받은 살갗은 희다

버티고 있던 긴 목이 살짝 기운다

애틋한 사후의 눈빛이나,

눈부신 살결은 분리된 지 오래

웅크리고 헤매던 계절도 멈추고

바람 한 점 없는 벽,

사각의 틀 아이 울음만 가득하다

전시장을 빠져나오는데

내 안의 미로, 출구가 안 보인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여인의 초상’

 

-이영애, 「여인의 초상」 전문

 

  이영애의 「여인의 초상」은 모딜리아니가 그린 수많은 여성의 초상화 중 특정 작품이 아닐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여인의 초상」이라는 이름을 가진 초상화가 잘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이영애의 작품은 모딜리아니 그림 속의 이미지와 병원에서 죽어가는 여인의 이미지가 오버랩된 형식을 띠고 있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초상들은 대부분 얼굴과 목이 길쭉하다. 때로는 눈동자가 없어 고독하다거나 또는 명상적인 느낌을 준다. 인간성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주는 그의 초상들은 선량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슬픔이 묻어난다. 그런 모딜리아니가 그린 초상들화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지는 몰라도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바라보는 많은 시인들의 시각은 슬픔의 아름다움을 읽어내는 경우가 많다.

 

 

 

검은 타이를 맨 여자(1917년)

 

  이영애의 「여인의 초상」은 슬픔을 넘어서 차라리 참담한 느낌이 든다. “다급해진 발자국들”, 한밤을 흔드는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암시하듯 초를 다루는 생사의 시간이 작품 서두에 배치되어 있다. 어떤 여인이 “나간 심장을 겨우 불러들여”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간다. 그 여인은 “응급실 산소마스크에 생을 의지”하고 있다. 생명의 맥박을 알리는 신호가 그녀의 옆에 있는 모니터에서 풀벌레 소리를 “간간히 울고 간다”

  이러한 일은 우리 주변에 흔히 있는 일로 우리는 길을 가다가 병원 구급차가 소리를 내며 긴박하게 달려가는 모습을 볼 때 누군가의 생사가 궁금해 진다.

  여인은 “생각, 몸놀림, 모두 통화불능”의 상태로 “벼랑의 끈을 놓은 듯 그녀는 평온하게/ 뜻 모를 바닥으로 깊숙이 멀어지고 있다” 가망 없는 여인이 죽음의 늪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인은 잠시 꿈결처럼 환상이 떠올랐던 것일까. “어스름 동굴 술렁이는 빛깔 따라/ 막막한 동공엔 박쥐들이 날고/ 몸속 푸른 이끼의 날들 길게 감겨 나온다” 이제 죽음이 임박한 여인은 “마알간 이슬방울처럼 링거병 하고/ 액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붉은 물감으로 수혈 받은 살갗”이지만 “희다” 이미 죽음에 이르렀으므로 “버티고 있던 긴 목이 살짝 기운다.” 여인의 생명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게 된다.

  이 작품에서 “긴 목”만이 모딜리아니 그림 속의 인물을 떠오르게 할 뿐 구체적인 그림의 형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어딘가 모르게 슬픈 모딜리아니 그림 속의 여인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시인의 개인적인 체험과 모딜리아니 그림 속 여인의 이미지가 맞아떨어진 것은 아닐까.

 

 

 

잔 에뷔테른(1919년)

 

  여인이 죽었으므로 “눈부신 살결은 분리된지 오래”이고, “웅크리고 헤매던 계절도 멈추고/바람 한 점 없는 벽”, 그리고 아이의 엄마였던 여인의 죽음에 “아이의 울음만 가득하다” 지금껏 화자는 “사각의 틀” 속에 있는 모딜리아니의 “여인의 초상”을 바라보며 어떤 불행한 여인의 죽음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인의 초상”이라는 그림에서 시인은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화자는 전시장을 빠져나오면서도 “여인의 초상”이 지워지지 않는다. 불행하고 불운한 이 여인은 어린아이가 있는 젊은 여인이기 때문에 더욱 슬픔의 정서가 묻어난다. 화자는 자신의 삶과 여인의 불운을 겹쳐 바라본다. 그러므로 “내 안의 미로, 출구가 안보”이는 것이다.

  여인의 슬픔이 화자에게 전이된 것인데, 이 작품을 들여다보면 가슴이 먹먹하고 답답하다. 오늘도 어느 누군가가 지상을 떠나는 슬픔에 감염되는 까닭이다.

 

 

 

 

서 있는 누드(1917년)

 

  고재종의 「모딜리아니의 여인」은 그야말로 모딜리아니의 여인인 아내 에뷔테른을 지칭한다. 시인은 모딜리아니가 그린 여러 점의 「잔 에뷔테른」을 본 인상일 수도 있지만, 모딜리아니와 잔 에뷔테른의 사랑을 시의 배경에 두고 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키가 작은 나는 너의 기다란 목이 좋다

눈이 찌든 나는 너의 푸른 눈이 좋다

그렇게는 슬프고 아름다워서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곳을 응시하는 눈

 

나는 가난과 병마의 행려병자

나는 술과 마약의 보헤미안

나는 황금 이삭의 들판에서 쫓겨 온 이방인

보면 볼수록 흐릿해지고

보면 볼수록 보는 것 너머가 보일 뿐

부유와 추락과 파괴로 다가서는 낯선 거리여

 

이렇게 난폭한 삶을 수식하는 소품이 아닌

내게 있어 네 사랑은 폭풍과 같은 열정과 증오

찬 서리에 더욱 또렷한 들국화 같은

다독이며 쓸며 침착하고 강인한 내면

 

나의 모자라는 재능의 샘을 뿜어주리라

나의 고독과 우수를 또한 들여다보리라

그러니 내 사랑이 채 꽃피고 익기도 전에

시간은 나를 시간 밖으로 데려가려고 한들

너는 그걸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지켜보다가

마침내 천국에서도 나의 모델이 되기 위해

시간을 넘어 영원 쪽으로 몸을 던진다 한들

 

유난히 긴 목에서 진하게 묻어나는

너의 쓸쓸함을 내가 왜 읽지 못하겠느냐

꿈꾸는 듯 푸른 눈에 어린 너의 외로움은

모든 사람에게 처음부터 어려 있던 것

때론 눈동자마저 사라져버리는 너의 눈을

깊고 푸른 영혼이라고 굳이 말하진 않겠다

-고재종 「모딜리아니의 여인」 전문

 

  모딜리아니가 영국의 여성시인인 비어트리스 헤이스팅스에게 버림받아 쓸쓸하고 외롭게 살아갈 때 운명적인 여인이 나타났다. 열아홉 살의 잔 에뷔테른이라는 화가 지망생이다. 이때 모딜리아니는 서른네 살,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의 사랑은 뜨겁게 타올랐다. 오직 모딜리아니만을 위해 태어난 듯한 이 여인은 매우 순종적이고 헌신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겨우 3년밖에 이어지지 못했다. 모딜리아니가 병으로 죽자 이틀 후, 잔 에뷔테른이 모딜리아니의 저승길 동반자로 따라나섰기 때문이다. 이 슬프고 순정적인 여인의 죽음을 용기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녀에 대한 모욕이다.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버린 사람의 죽음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없기 때문이다.

  고재종의 「모딜리아니의 여인」은 시인 자신의 모습과 모딜리아니의 인생이 교묘하게 함께 버무러진듯한 느낌을 풍긴다. “키가 작은 나는 너의 기다란 몸이 좋다”는 화자의 진술은 어쩌면 시인 자신의 말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 같다. “눈이 찌든 나” 역시 시인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그래서 화자는 자신의 육체적 결핍으로 인해 “기다란 목”과 “푸른 눈”이 선망의 대상으로 보였을 것이다. “모딜리아니의 여인”의 “푸른 눈”은 “슬프고 아름다워서/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곳을 응시하는 눈”으로 화자에게 보이는 것이다.

  둘째 연에서도 시인의 삶과 모딜리아니의 삶이 만난다. “가난한 병마의 행려병자”가 조금 과장되기는 했지만 어쩐지 시인을 떠오르게 하는데 “나는 술과 마약의 보헤미안”에서는 답답하고 궁핍한 현실을 견뎌내기 위해 술과 마약에 빠진 모딜리아니의 모습이 연상된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모딜리아니가 그의 아내 잔 에뷔테른에게 바치는 슬픈 연가라고도 할 수 있다.

  모딜리아니는 언제나 가난했기 때문에 “황금 이삭의 들판”과는 먼 존재여서 물질적 풍요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방인”이었다. 그러므로 마치 마약을 먹은 듯 “보면 볼수록 흐릿해지고/ 보면 볼수록 보는 것 너머가 보일 뿐/ 부유와 추락과 파괴로 다가서는 낯선 거리”가 모딜리아니의 현실이고 처지였던 것이다.

  20세기 초 전통을 버리고 새로운 예술운동을 하기 위해 파리에 운집한 세계 각처의 젊은이들 중 피카소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이 성공을 거둔 반면, 평생을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딜리아니의 삶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모딜리아니아가 지쳐있을 때 만난 잔 에뷔테른은 그에게 무한한 위로와 행복을 전해주기에 충분한 여성이었다. 그러므로 모딜리아니가 사랑한 여인 잔 에뷔테른은 “찬 서리에 더욱 또렷한 들국화”같은 존재여서, 삶에 지친 모딜리아니를 “다독이며 쓸며 침착하고 강인한 내면”을 지닌 존재였다. 뿐만 아니라 모딜리아니의 “모자라는 재능의 샘을 뽑아”줄 것이고, “고독과 우수를 또한 들여다” 보아 줄 사랑의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1920년 7월 7일 결혼하기로 약속했지만, 끝내 결혼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랑이 채 꽃피고 익기도 전에/ 시간은” 모딜리아니와 잔 에뷔테른을 “시간 밖으로 데려”가고 말았다. 모딜리아니도 죽고 잔 에뷔테른도 모두 죽음에 이르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비극적인 사랑은 후일담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회자되고 있다. 즉 “천국에서도 나의 모델이 되어달라”는 마치 모딜리아니가 잔 에뷔테른에게 했을 법한 이야기와 “천국에서도 당신의 아내가 되어주겠다”는 이야기가 그것들이다. 그들의 사랑을 기리고자 후세 사람들이 만들어낸 잔 에뷔테른이 했을 법한 이야기인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배경으로 화자는 “마침내 천국에서도 나의 모델이 되기 위해/ 시간을 넘어 영원 쪽으로 몸을 던진다 한들”이라고 글을 붙인 것이다.

 

 

장 콕토(1916년)

 

  시인은 이 작품의 말미에서 모딜리아니의 말을 통해 잔 에뷔테른의 “유난히 긴 목에서 진하게 묻어나는” “쓸쓸함”과 “꿈꾸는 듯 푸른 눈에 어린” “외로움”은 실은 잔 에뷔테른만의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처음부터 어려 있던 것”이라고 정의한다. “폭풍같은 열정의 사랑”을 통해 “시간을 넘어 영원쪽으로 몸을 던진” 비극적이지만 진실한 사랑은 모두가 “쓸쓸함”과 “외로움”을 느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랑을 한 사람들에게 당연히 “어려있던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진정한 보편적인 사랑의 가치를 말한다. 이렇듯 지독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눈동자마저 사라져버”리는데 그러한 눈을 “깊고 푸른 영혼”이라고 굳이 말하지 않겠다는 화자의 사랑에 대한 이해는 마침내 진실된 사랑을 하게 되면 눈동자마저 필요없다고 말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침내 이러한 눈을 “깊고 푸른 영혼”이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고재종의 「모딜리아니의 여인」은 앞에서 밝힌 것처럼 모딜리아니가 그린 그의 아내 잔 에뷔테른의 초상화의 인상과 더불어 모딜리아니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뭉뚱그려 그 느낌을 가지고 자신만의 아름답고 슬픈 사랑을 형상화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미술작품은 시인들을 만나 새로운 이미지와 의미를 생산해 낸다. 이는 미술과 문학이 서로 만나 새로운 예술 작품을 생산해 낸 것과 같이 우리나라 시인들의 독창적인 눈을 통해 새로운 정서와 사색의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출처 : 나무의 정신
글쓴이 : 시와사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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