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스크랩] 김환기 金煥基(1913-1974)

네잎 2016. 2. 23. 09:52

김환기 金煥基(1913-1974)

 

나는 외롭지 않다. 나는 별들과 함께 있기에…."
수화 김환기 이조의 목공이나 백자의 참맛을 아는 귀한 눈길의 소유자'
'전통적인 동양의 미나 한국의 멋 특히, 한국 공예미의 참 멋을 꿰뚫어 보는 그의 뛰어난 안목이
우리들 사이를 더 빨리 좁혀 주었다. '(崔淳雨.. '樹話'/먼저 '金煥基' 화집중)
'청색의 소용돌이요, 입자들의 교향악'..쿠르티옹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

 

 

저녁에 / 김광섭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피난열차(1951)]

625 남북 전쟁으로 인해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온 중에 그린 그림이다.
참혹한 전쟁 중에도 예술에의 정열을 잃지 않은 그의 정신력이 만든 작품.
당시의 피난가는 사람들을 태운 열차는 비참하고 초라하였겠지만 그가 그림은 전쟁의

아픔을 담기에는밝은 색을 띠고 있다. 덕분에 현실감각을 잃은 작품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수화의 작품들은 유미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

 

 

[산(1955)]

김환기는 산, 달, 매화, 사슴, 항아리 등 한국적이며 지극히 동양적인 소재를 이용하여
추상화를 많이 제작하였다. 그림 속 산들은 둥글고 완만하여 전형적인 한국 산들의 모습이고,
함께 어우러진 둥근 달 또한 우리네의 보름달이다. 한국의 온화하면서도 따뜻한 정서이다.
또한 정성껏 칠해진 질감과 조화로운 색감이 그림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여인과 매화와 항아리(1956)]

매화나무 사이로 항아리를 들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이다.
당시의 사진 자료를 보아도 웃옷을 벗고 일하는 여인들의 모습은 당시

시골마을에서 종종 볼 수 있었다. 어떠한 불안감이나 적개심 없이 평화롭게

조선 여인의 삶을 살고 있는 시골 아낙네들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수화는 한국인의 소박한 정서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영원의 노래(1957)

단순한 형태로 변형된 달, 새, 구름, 꽃, 산 그리고 그가 가장 사랑한 도자기를
화폭에 차분하게 정돈하듯이 구성하였다. 또한 청색과 녹색을 주조로 하여

산뜻하면서도 청아한 한국의 미를 잘 표현하였다.

이 작품은 그가 파리에 머무르면서 제작하였으며
그 곳에서 연 개인전에 출품하여 외국인에게 우리의 멋을 알린 작품이다.


 

 

달밤의 화실(1957)

김환기가 가장 좋아하는 색은 푸른 색이었다. 그가 좋아하던 푸른 색은

한국 하늘의 색이었으며, 동해 바다의 색이었다.

어느 프랑스 방송국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그렇게 자신의 푸른 색을 설명하면서
그 푸른 색 속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은 깨끗하고 단순하다고 말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푸른 색은 한국인의 색이었고, 그의 마음을 표현하는 색인 것이다.

 

 

[항아리와 날으는 새(1958)]

그가 예술을 배웠다는 조선의 도자기들을 배경으로 선비 같은 학을 닮은

새 두 마리가 날고 있다.둥근 모양의 도자기들은 공중에 붕 뜬 채로 배경이 되어주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그 모습이 마치 수화의 꿈처럼 느껴진다. 꿈결 같은 그의 상상의 세계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달과 배(1959)

제목을 보기 전에는 달과 배를 그렸다고 쉽게 연상이 되진 않는다.

김환기의 달은 산이나 강, 배, 나무등과 함께 어우러져 자연속의 조화를 이루어간다.

화폭의 가운데를 흰 배가 가로지르고 있고, 하늘에 뜬 달이

바다의 수면에 반사되어 있다. 이렇듯 그가 늘 작품에 표현하고자
하였던 것은 한국 고유의 자연과 정서였다.

 

 

 

무제(1960)

점차로 그의 그림들이 현대적 추상화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파리에서 돌아와 홍익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제작한 작품들 중 하나이다.

단순화된 산과 강 그리고 강물체 비친 달을 푸른색을 기초로 하여
그렸다. 후에 말년의 그가 주로 그려내는 무제라는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점들이
이 작품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날으는 새 두마리(1962)

김환기의 작품 중에 사람들에게 매우 인기있는 작품들 중 하나다.

화사한 색감도 인상적이지만, 두텁게 칠해도 결코 무겁지 않게 느껴지는 질감도 독특하다.

멀리 있는 달이 아직 높지 않은 걸 보니, 초저녁, 해가 지고 난 후 새끼들을 위해

어미 새 두 마리는 먹이를 입에 물고 바삐 날아가는 모양이다.
소박하고도 따뜻한 한국의 정서이다.

 

 

10만개의 점(1973)

추상의 세계는 다른 아무 것도 아닌 화면 그 자체의 구성일 뿐이라지만

김환기의 추상에는 자연에서 느껴지는 서정적 감흥이 존재한다.

뉴욕시절 제작한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의 점들을 찍으면서 점 하나하나에

조국의 강산과 그리운 사람들을 연상하면서 찍어갔다고 고백하였다.
조국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의 표현이 온 화폭 가득히 넘쳐 흐르고 있다.

 

 

달 두 개

 

 

달과 매화    

 

 

야상곡

 

 

항아리

 

 

 매화와 정물

 

 

 

산호섬을 날으는 새

 

 

달과 항아리

 

 

사방 탁자

 

 

사슴

 

 

 무제

 

 

 무제

 

 

녹색점

 

 

 

 무제

 

 

 

 새와 달

 

 

정원

 

 

뱃노래  

 

 

봄의 소리

 

 

산월 

 

 

항아리와 시

 

 

영원의 노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

 

 

김환기(金煥基.1913.2.27∼1974.7.25)

 

서양화가. 호 수화(樹話).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읍동리 출생. 1936년 일본대학 미술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연구과를 수료하였다. 대학 재학 시절인 1934년 아방가르드미술연구소를 만들고 추상 미술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1952년 홍익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미술학부장과 학장을 지내면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심사 위원과 대한미술협회 회장,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등을 맡기도 하였다. 1965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의 커미셔너로 출국한 뒤 미국에 정착하여 뉴욕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죽은 뒤 뉴욕과 서울에서 각각 그를 위한 회고전이 열렸다.

작품 경향은 크게 4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초기에 해당하는 수업 시대는 당시 일본에 소개되기 시작한 새로운 추상 미술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때이다.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을 통하여 볼 때, 1937년 작품인 <향(響)>과 1938년 작품인 <론도>등에서 시도된 기계의 찬미 등에서 미래파적인 요소와 구성주의적 색채를 찾아볼 수 있다.

광복 이후부터 부산 피난 시절을 거쳐 파리로 건너가기까지의 시기는 한국적 소재의 발견으로 일관되었다. 달과 산과 구름과 학 그리고 나목(裸木)을 통하여 한국적 풍류와 시적 정서를 표출하려는 것이 이 시기의 주된 경향이었다.

약 3년간의 파리 시대는 이러한 주제가 더욱 요약되고 함축된 이른바 양식의 심화기로 볼 수 있다. 항아리와 달로 대변되는 둥글둥글한 형태가 화면을 채워 버린다든지, 극히 단순한 선으로 요약된 산과 몇 그루의 나목과 산에 걸린 달로 압축된 <월광(月光)> <산월(山月)> 등은 이 시기를 대표할 만한 작품들이다.

파리에서 돌아와 미국으로 건너갈 때까지의 서울 시대는 파리 시대의 지속으로 보인다. 하지만 구성이 보다 단순해지면서 상징적 요소가 더욱 짙게 내포되기 시작하였다. 하나의 긴 수평선으로 상징되는 강이라든지, 곡선의 중첩으로 상징되는 산 그리고 몇 개의 사각 점획들로 대변되는 풍경 가운데의 점경 등이 상징적이면서 풍부한 공간 해석으로 이끌어 갔다.

미국으로 건너가 사망 때까지의 약 10년간의 뉴욕 시대는 지금까지의 경향에 비하여 커다란 변모를 보였다. 점과 선이 무수히 반복되어 찍혀진 점묘는 추상 공간의 무한대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두껍게 발라 올리던 마티에르의 구축성도 없어졌다. 그 대신 수묵(水墨)과 같이 투명한 질감을 사용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1970년 제1회 한국일보대상전에서 대상을 받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있다. 그는 동양의 직관과 서양의 논리를 결합한 한국적 특성과 현대성을 겸비한 그림을 구상과 추상을 통해서 구현한, 우리나라의 대표적 현대 화가라 할 수 있다. 한편 그의 예술정신을 기리는 환기미술관이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1992년 개관되었다.

 

작품세계

 

김환기, 그는 한국인이다. 그는 근원적인 형태의 표상들을 간직하고 있으며 아울러 그의 민족을 상징하는 시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다. 김환기는 섬세하게 이끌어 낸 꿈의 색조를 통해 보기 드문 감각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 영적인 흔적은 우아한 멋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그의 예술은 현재의 것임과 동시에 전통적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대 동양예술과 현대 서구의 새로운 예술을 조화시킬 줄 알았던 것이다. 세느가의 데생들과 오스만 대로의 유화로 나뉘어 진행되는 그의 전시는 놓쳐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의 작품은 중국이나 일본 것들과는 차별이 되는 한국적인 특징을 보여 준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그가 한국전쟁 전에 서울에서 시작한 작업들이다. 그는 두꺼운 재질감을 이용하는데 이런 방식은 어떤 경우에 에나멜 또는 얕은 부조처럼 표현된다. 대개가 순수한 백색으로 그려진 항아리들은 일종의 라이트모티브를 형성하며, 늘어진 나무 가지들 사이로 보일 때는 보름달을 연상케 한다. 푸른 바탕 위에 새들과 꽃들로 구성된 소품들은 상징과 기호의 가치를 갖는다는 점에서 최근의 서구 예술과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김환기의 전기를 통해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한국의 자연을 그리워하며 자신의 작품세계에 이를 반영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수많은 뉴욕 시기 작업에 녹아 있는 한국적인 색채와 점묘들은, 그가 오랫동안 즐기던 백자의 곡선을 연상시키는 선묘의 미감이 선염되어가면서 뉴욕 시기의 절정기에 도달하게 된다. 이처럼 한국적 자연은 1950년대의 <산>과 <하늘>, <날으는 새> 시리즈, 1960년대의 달ㆍ새 등의 소재를 거쳐서 <무제>와 1970년대의 완전추상에 이르는 뉴욕 시기까지 김환기 예술의 원동력으로 작용해 왔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모더니즘 1세대이며 한국적 정서를 양식화한 예술세계를 펼친 수화 김환기는 일찍 동경에 유학하여 미술 공부를 시작하였다. 김환기의 예술세계는 초기인 동경시대와 중기인 서울, 파리시대, 그리고 후기인 뉴욕시대로 나누어진다. 한국의 추상미술의 도입기인 1930년대 후반 일본화단의 전위적 단체인 자유미술가협회전 창립에 참여함으로써 본격적인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동경에서 전위적인 미술그룹인 자유미술가협회와 아방가르드 양화 연구소와 인연을 맺으면서 활발한 활동을 한다. 초기인 동경시대는 입체파, 구성파의 영향을 거쳐 추상미술에 도달하였으며 이 때의 작품들은 그의 고향 기좌도를 그리워하면서 다양한 작품을 시도하였던 자연주의적 미의식의 실험기의 특성을 보여준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구체적인 형태와 추상적인 형태들을 통한 표현이었다. 귀국하여 서울 정자옥(현 미도파백화점)화랑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1940년부터 1945년을 전후해서는 시대적 상황과 작가 개인의 불행사 탓인지 작품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한국미 탐구기라고도 할 수 있는 2단계 시기는 추상적 바탕에 자연적 이미지를 굴절시킨 독특한 화풍을 펼쳐 보였다. 특히 이 시기 김환기가 많이 다룬 소재는 달, 산, 항아리, 학, 매화 등 한국적 모티프를 담은 것이었다. 자연을 노래하고 자연에 귀의하려는 동양인의 의식을 근간으로 하면서 우리의 고유한 정서를 양식화한 점에서 그의 예술은 많은 공감을 얻은 것이 되었다.

그의 기조색인 청색 역시 몽환적이면서도 한국의 자연을 대변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적 모티프에 대한 탐닉은 1956년 프랑스로 건너가 1959년 귀국하기까지의 파리 시절에서도 농도를 더하였다. 귀국하여 안정을 바탕으로 한국적 시정의 그림이 무르익어 많은 개인전과 작품을 발표하였다. 자신만의 미의 세계를 구현한 3단계 시기인 1963년, 뉴욕에 정착하면서 김환기의 예술은 또 다른 변신을 보인다. 구체적인 자연대상은 지워지고 선, 점, 면들로 구성되는 순수한 추상에로의 변모이다.

우선 모티프 해소, 순화된 색감, 공간의 심화와 확대라는 특징으로 묶을 수 있다. 단색조 화면에 같은 단위의 점을 반복적으로 찍어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 미국에서 유행한 후기 색면추상(Color Field Painting)과 미니멀아트(Minimal Art) 등의 영향이다. 하지만 그가 점들을 찍으면서 생각하였던 것은 한국의 자연과 추억들이었다. 서구적인 양식과 방법의 영향을 받았으나, 주체성 있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표현하였던 것이다.

 

 

공적

 

1913년 전남 신안에서 출생한 김환기는 일찍이 동경에 유학하여(일본대학 예술학부) 1930년대 후반 일본화단의 전위적 단체인 자유미술가협회전 창립에 참여함으로써 본격적인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했다. 해방 후 1947년에는 유영국, 이규상과 더불어 [신사실파]를 결성하여 모더니즘의 계보를 형성하는 한편 서울대학, 홍익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쳐 보였다.

1956년에는 프랑스로 진출하여 약 3년간 체류했으며 1959년 귀국 후 홍익대 미대 학장, 미술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는 등 미술계 중심에서 활동했다. 19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으며 그 해 미국 뉴욕에 정착한 이후 1974년 작고하기까지 뉴욕 화단에서 활동하였다.

김환기의 예술세계는 초기인 동경시대와 중기인 서울, 파리시대, 그리고 후기인 뉴욕시대로 나누어진다. 초기인 동경시대는 입체파, 구성파의 영향을 거쳐 추상미술에 도달하였으며 해방 후는 추상적 바탕에 자연적 이미지를 굴절시킨 독특한 화풍을 펼쳐 보였다. 자연을 노래하고 자연에 귀의하려는 동양인의 의식을 근간으로 하면서 우리 고유한 정서를 양식화한 점에서 그의 예술은 많은 공감을 얻은 것이 되었다.

1963년 뉴욕에 정착하면서 구체적인 자연대상은 지워지고 선, 점, 면들로 구성되는 순수한 추상에로 변모한다. 방법상에서도 지금까지의 두터운 마티엘(질감) 위주에서 벗어나 안으로 스미는 듯한 엷고 투명한 안료로 뒤덮히는 은은한 여운의 화면을 보여주었다. 김환기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들은 만년에 해당되는 70년대에 집중적으로 창작되어 나왔다. (예술원 홈)

 

환기미술관(煥基美術館)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현대 미술관. 고 김환기(金煥基)의 예술품을 보존·연구·전시하는 미술관으로 1992년 11월 5일에 개관하였다. 김환기의 예술이 갖는 귀중한 가치와 그가 생전에 미친 한국 미술계의 영향을 다시 되새기며 작가가 생전에 꿈꾸었던 한국미술의 풍부한 결실을 실현하기 위해 세워졌다.

작가가 생시에 구상하였던 현대 미술관을 구체적인 실현의 단계로 옮긴 환기미술관은 작가가 작고한 후 미망인 김향안(金鄕岸)에 의해 설립된 환기재단(Whanki Foundation)이 발판이 되어 설립되었다.

미술관 설계는 보스톤에서 활동하고 있는 건축가 우규승(禹圭昇)이 맡았다. 미술관이 설계되고 구체적으로 준공되는 과정에서 도미니크 보조(당시 퐁피두 센터 총관장)의 조언도 크게 기여한 바 있다.

시설은 본관ㆍ별관ㆍ수향산방의 3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본관은 3층 건물로 전시실과 수장고ㆍ관장실ㆍ학예 연구실ㆍ사무실이 있고, 별관은 1층에 카페테리아, 2층에 기획 전시실이 있으며, 수향산방(김환기와 김향안의 호인 ‘수화’와 ‘향안’에서 딴 이름)은 1층에 강의실, 2층에 기념관으로 꾸며져 있다.

김환기는 한국 현대 미술에 있어 모더니즘 제1 세대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그의 활동 중에서 1963년부터 작고한 1974년까지의 활동을 뉴욕 시대라고 하며, 이때 가장 왕성한 열의로 더욱 확고한 자기 세계의 완성을 보였다.

즉 뉴욕 시대는 순수한 점ㆍ선ㆍ면의 조형적 요소로 보다 내밀한 서정의 세계로 진입하였다. 환기미술관은 캔버스 위에 유화 종이 위의 유화ㆍ꼴라쥬ㆍ과슈ㆍ데생ㆍ오브제 등 김환기의 뉴욕 시대 대표작 1,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환기미술관은 작가의 대표적인 작품의 상설전과 특별 기획전을 여는 동시에 현대 미술에 대한 각종 기획과 행사를 병행하고 있다.

김환기의 예술만에 국한하지 않는 또 하나의 기능, 즉 현대 미술에 대한 기획과 전시의 공간도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적 성격의 미술관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젊은 세대 작가들을 위한 기획전과 테마전을 1년에 2∼3차례 열고 있다. 이외에도 현대 미술의 주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로 미술의 해외 교류의 프로그램을 마련, 〈프리환기〉라는 독특한 형식의 국제전으로 비엔날레 형식으로 열고 있다.

또한 미술관의 교육적 기능을 위한 미술 강좌로 〈환기포럼〉을 운영, 전문 미술인ㆍ직장인ㆍ학생들을 위한 다양한 미술 이론 강좌를 실시하고 있다. 그리고 음악회ㆍ강연회ㆍ퍼포먼스 등 각종 이벤트와 행사도 마련하고 있다.

 

 

신안 김환기 가옥(新安金煥基家屋)

 

중요민속자료 제251호. 소재지 전남 신안군 안좌면 읍동리 955번지. 서양화가 수화 김환기(1913∼1974) 선생의 생가이다. 현재 안채와 화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생가는 읍동 마을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안쪽에서 보아 왼편에 안채가 있고 오른편에 화실이 있다. 안채는 1920년에 지은 것으로 원형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데 화실은 1940년대에 지은 것이다. 안채는 ㄱ자형 평면을 갖춘 집으로 왼쪽부터 곳간·건넌방·대청마루·안방·정자 순으로 꾸몄다.

정자 앞쪽으로 꺾어져 다시 방이 1칸 있는데 이 방은 선생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라고 한다. 화실은 본래 초가였으나 현재는 시멘트 기와를 얹은 一자형 평면을 갖춘 집이다. 앞쪽으로 방 2개가 있고 그 뒤쪽으로 부엌이 있으며 왼쪽으로 넓은 대청과 끝에 곳간을 두었다. 이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민가 양식이다.

김환기는 우리나라 모더니즘의 제1세대 화가로 한국의 고전적 소재를 추상적 조형언어로 양식화하여 한국미술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인물로, 이곳은 그의 유년기와 청년기 작품활동이 이루어졌던 공간이라는 역사적, 예술적 가치와 함께 20세기 초반 전통가옥이 근대로 들어서면서 사회의 변화에 따라 실용적으로 변용되어 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당초에는 전남 신안 기념물 신안 김환기생가(제146호)로 지정(1992.11.30)되었으나 신청(2007. 5. 3)을 받아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자료 제251호로 지정(2007.10.12)되었다.

 

----------------------------------------------------------------

 

출처 : 아름다운 세상 -아세향-
글쓴이 : 소리 원글보기
메모 :